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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물로 보는 조선시대 여름나기

역사/기타

by 덱스트 2022. 10. 1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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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물로 보는 조선시대 여름나기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더 시원하게 살고 있을까. 에어컨에 공기청정기까지 있으니 그때와 비교하면 신선놀음을 하는 것만큼이나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더위가 무섭고 여름이 두려운 것은 현재 내가 겪는 어려움이 타인의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여름에도 몸과 마음을 잘 지켜 서늘한 가을을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여름은 이미 왔고, 머물러 있지만 떠날 것이다. ‘어떻게 지낼 것인가?’가 매년 우리가 마주치는 숙제일 것이고, 2020년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대답이 있어야 하는 해가 되었다. 큰 움직임이나 변동 없이, 어찌 보면 사소한 생활 속 소품들로 여름을 견뎌내고 이겨내던 옛적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옮겨 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계절이다.

 

이인문,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36.5×29cm, 삼성리움미술관

이경윤,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16세기, 마에 연한 색, 27.8×19.1cm, 국립중앙박물관

 

시원한 계곡물에 탁족하고 쏟아지는 폭포를 감상하면서

시원하게 여름나기

일상에서 돈 들이지 않고도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폭포를 감상하는 관폭(觀瀑)이 대표적이다.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년)이 그린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는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한 작품이다. 예리하게 각이 진 거친 바위 사이로 흰 폭포수가 거침없이 떨어진다. 이백(李白, 701~762년)이 여산폭포(廬山瀑布)를 보고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고 감탄했듯 웅장하고 멋진 폭포다. 쏟아지는 폭포수를 보면 알게 된다. 물속에 굳이 발을 담그지 않더라도 폭포를 바라보고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잊게 된다는 사실을. 만약 선비가 적삼 밑에 등거리라도 입었다면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에 실려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것이다.

 

탁족(濯足)도 선비들이 즐겨하는 대표적인 피서법이었다. 탁족은 가까운 계곡이나 냇가에 나가 맑은 물에 발을 담그는 행위다. 조선 중기의 종실화가 이경윤(李慶胤, 1545~1611년)이 그린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는 탁족의 즐거움을 잘 보여준 득의작이다. 선비는 가슴까지 풀어헤치고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갔는데 계곡물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문지르고 있다. 〈고사탁족도〉는 오른쪽 하단에서 대각선으로 뻗은 나무를 배치하고 그 아래 인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다. 선비는 계곡물에서 탁족하며 굴원(屈原)의 ‘탁영탁족(濯纓濯足)’을 음미했을 것이다. 즉,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어내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는 구절을 읊조리며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점검하다 보면 몸의 더위뿐만 아니라 마음의 더위까지도 말끔히 씻겨나갔을 것이다.

조영석, <현이도(賢已圖)>, 18세기, 비단에 연한 색, 31.3×43.3cm, 간송미술관

신윤복, <연당야유도(蓮塘野遊圖)>,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28.2×35.2cm, 간송미술관

 

부채와 돗자리로 더위도 쫓고 잠도 자고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년)이 그린 〈현이도(賢已圖)〉를 보면 부채가 지체 높은 선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선비들이 소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있는데 구경꾼 중 갓을 쓴 양반과 떠꺼머리총각이 부채를 들고 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서 장기판을 벌인 것을 보면 단오가 지난 여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기판이 벌어진 바닥에는 멍석이 깔려 있다. 멍석은 짚으로 엮어 만든 깔개로 사람들이 앉거나 곡식을 너는 용도로 쓰였다.

 

멍석이 주로 야외에서 행사할 때 흙바닥에 까는 매트라면 돗자리는 실내에서 썼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4년경)이 그린 〈연당야유도(蓮塘野遊圖)〉는 고위급 양반들이 연꽃 피는 여름날에 후원의 연못 곁에서 기생들과 함께 여가를 즐기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는 세 개의 돗자리가 깔려 있다. 돗자리는 왕족만이 쓸 수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왕골자리를 비롯해 대나무로 만든 대자리, 갈대로 만든 삿자리 등 다양하다. 돗자리는 시문된 문양에 따라 꽃 그림이 들어간 화문석(花紋席), 용 그림이 들어간 용문석(龍紋席), 호랑이 문양이 들어간 호문석(虎紋席) 등등의 이름이 붙었다. 돗자리는 통기성이 좋아 잠자리에 깔고 자면 여름나기에 그만이다.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밤에는 아무리 부드러운 요를 깔고 잔다 해도 쉽게 잠들 수 없다. 이럴 때 쿨 매트인 돗자리를 깔고 자면 까슬까슬하면서도 땀이 차지 않아 꿀잠을 잘 수 있다. 시원한 돗자리 위에서 죽부인을 낀 채 모시 이불을 덮고 자면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어도 여름밤은 금세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고상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가난한 백성들의 삶은 특별한 냉방장치 없이 그저 온몸으로 더위를 견뎌야만 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張維, 1587~1638년)의 「여암기(旅庵記)」에는 신흠(申欽, 1566~1628년)이 춘천으로 유배가 백성의 집에 우거(寓居)하는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때마침 무더운 여름철이라서 한증막처럼 뜨거운 열기가 푹푹 쪄 올라오고, 모기며 파리며 이와 벼룩들이 기승을 부려 서로 상승 작용을 하는 바람에 선생이 이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그만 학질(瘧疾)에 걸리고 말았다.” 장유는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한 신흠이 유배지에서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이렇게 표현했겠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이런 고생은 일상이었다.

 

여름밤에 모기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시문집에도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얄미운 모기[憎蚊]」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맹호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고/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있어도/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모기 한 마리 왱하고 귓가에 들려오면/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다/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배 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금세 울퉁불퉁 혹이 돋아 부처 머리처럼 돼버리고/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 이미 가고 없어/싸워봐야 소용없고 잠만 공연히 못 자기에/여름밤이 지루하기 일 년과 맞먹는다네.”

 

그래서 사람들은 사방에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았다. 비록 모기를 쫓느라 제 뺨을 제가 치고 넓적다리를 급히 만져도 헛수고를 하면서 여름밤이 계속되었지만 쑥 향이 가득한 모깃불을 피워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비록 왕골자리가 없어도 여름밤은 마지못해 지나갔다.

 

때론 관폭과 탁족으로 더위를 물리치고, 때로는 모기와 벌레 때문에 잠 못 드는 여름밤이 계속될 때도 있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면 어느새 무더운 여름이 기울고 가을 찬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때론 비가 내리고 폭풍이 몰아칠 때도 있다. 그런 날도 사람들은 여전히 일터에 나가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이흥효, <산수화>, 비단에 연한 색, 24×19.7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의 화가 이흥효(李興孝, 1537~1593년)가 그린 산수인물화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는 그런 삶의 애환을 특징적으로 잡아낸 작품이다. 화면은 산수화라고 할 정도로 근경과 원경 모두 산만 보인다. 근경에 우뚝하게 모습을 드러낸 두 그루 소나무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하다. 소나무 줄기가 왼쪽으로 구부러진 것을 보면 비바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는 듯하다. 선비 일행은 그 세찬 바람에 밀리기라도 하듯 화면 하단 좌측 끝에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하마터면 ‘산수인물화’에서 인물이 빠지고 ‘산수화’만 될 뻔했다. 그림 속에서 선비는 삿갓에 도롱이를 입고 나귀의 발길을 재촉해 다리를 건너고 있다. 어깨에 짐을 멘 시동 역시 삿갓에 도롱이를 입고 선비의 뒤를 따른다. 선비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길을 더듬어보면 대각선 오른쪽 중앙에 관문이 보인다. 저기가 선비의 목적지일까. 아니면 저 문을 통과해서 더 가야 할까. 이런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비 일행은 폭우를 뚫고 기어이 목적지까지 도달할 것이다.

 

비바람 속을 뚫고 가는 선비 일행을 보고 있자니 최근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 자꾸 응원하게 된다. 지금 겪는 시련이 얼른 끝나기를. <동경산수도>의 선비처럼 겨울까지 코로나의 호된 바람을 계속 겪는 일은 없기를. 기원하고 또 응원한다.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더 시원하게 살고 있을까. 에어컨에 공기청정기까지 있으니 그때와 비교하면 신선놀음을 하는 것만큼 이나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더위가 무섭고 여름이 두려운 것은 현재 내가 겪는 어려움이 타인의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여름에도 몸과 마음을 잘 지켜 서늘한 가을을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여름은 이미 왔고, 머물러 있지만 떠날 것이다. ‘어떻게 지낼 것인가?’가 매년 우리가 마주치는 숙제일 것이고, 2020년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대답이 있어야 하는 해가 되었다. 큰 움직임이나 변동 없이, 어찌 보면 사소한 생활 속 소품들로 여름을 견뎌내고 이겨내던 옛적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옮겨 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7월이다.

 

*"문화와 나" 2020년 봄여름호(2020년7월22일)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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