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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의 라이벌,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역사/기타

by 덱스트 2022. 8. 31.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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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대 인물인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 남명(南冥) 조식(曹植)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본분이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라면 학문을 이룬 뒤 이를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대표한 학자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은 조식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조식! 그는 경상우도(慶尙右道)를 대표하는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연산군 7)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삼가현 토동(兎洞) 외가에서 조언형(曺彦亨,1469~1526)과 인천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中)이며, 호가 남명이다. 18년간 살았던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집을 지어 후진을 양성한 까닭에 산해선생이라고도 불린다.

 

조식의 집안은 증조인 조안습(曺安習) 때부터 삼가의 판현(板峴)에 살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집안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는데, 안습의 경우 문관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생원시(生員試)에 그쳐 가문의 중흥을 이루지 못했다. 가문을 일으키려는 조안습의 꿈은 조식의 부친인 조언형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조언형과 조언경 두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부친 언형은 생원시와 전시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요직인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가문이 창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조식의 숙부 조언경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가솔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부친 조언형 역시 말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조식의 외조부는 충순위 이국(李菊)이다. 조식의 외가인 인천 이씨 집안은 고려 때 6대조 이작신(李作臣)이 삼가로 유배 온 이래 이곳 토박이가 되었다. 외가의 집터는 풍수적으로 상당히 명당이었다고 전한다. 한 예언가가 지나가면서 그 집터를 보고 신유년(1501)에 이곳에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이다라 예언했다고 한다. 이후 조식의 부모가 처가에 들렀다가 누런 용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이씨 부인이 임신을 했고, 예언처럼 신유년 음력 6 26일에 이곳에서 조식을 낳았다.

 

벼슬살이를 했던 부친 덕분에 어린시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5세까지 삼가에 있는 외가에 살다가 부친이 문과에 장원을 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부친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조식은 연화방(蓮花坊)이란 곳에 살면서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부친인 조언형은 언론과 감찰 업무를 담당한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각각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언론과 감찰 업무를 맡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우대를 받았던 관직이다. 그들은 고과(考課- 업무평가)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하게 답례하도록 규정하는 등 의 우대를 받았다. 특히 국왕에게 직언을 하는 사간원은 언론의 대상이 국왕인 점에 비추어 음직이 아닌 문과 출신자만 선발되던 자리다.

 

벼슬길을 버리고 진정한 학문의 길을 찾다

 

15세에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임명되자 단천으로 이주한 조식은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학·병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를 했다. 그가 실천과 비판 의식을 지닌 선비로 성장한 데는 지방관 생활을 한 부친의 영향이 있었다.

 

어린 조식은 지방 관아에 생활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학문에서 찾았다.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했던 조식은 젊은 시절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 당송8대가 중의 한사람)의 고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1518 18세에 조식은 부친을 따라 서울 장의동(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로 이주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성운(成運성우(成遇) 형제의 집과 가까웠다. 성운은 훗날 1545(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형이 화를 당하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은거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웃사촌이었던 조식과 성운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인격을 수양해갔다.

 

평온하게 학문 활동에 매진하던 중인 1519(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었는데, 이때 조식의 숙부인 조언경도 화를 당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조식은 벼슬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운 형제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연이은 사화를 지켜보면서 벼슬길에 회의를 갖기도 했지만, 곧장 과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520(중종 15)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초시에 모두 급제한 조식은 이듬해 문과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 후 과거 준비와 함께 학문을 닦던 그에게 일생의 항로를 바꾸는 전기가 찾아왔다. 과거 시험공부를 하던 중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는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허형(許衡, 1279~1368, 원나라 학자)의 글이 그의 가슴을 친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다. 이후로 조식은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을 버리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데 에 전념하였다. 실생활에서도 유학의 성현이자 대유(大儒)들인 주렴계, 정명도,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아침마다 절을 올릴 정도로 독실하게 공부했다.

 

 

()과 의()를 실천한 지리산 처사(處士)

 

조식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 ()’ ()’였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겼다. 그에게 있어  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모든 진리는 이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1526년 갑작스레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른 뒤 조식은 벗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벗 성우는 그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와 대화하면서 시골에서 게을리 공부하면 금방 뒤쳐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식은 모친의 허락을 받아 의령 자굴산으로 들어가 공부에 전념했다. 2년간의 산속 생활을 끝낸 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집 근처 언덕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했다.

 

조식이 김해에 독서당과 집을 지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벗인 성운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친구들이 찾아왔고, 오랜 시간 학문에만 전념하여 쌓은 내공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점차 퍼져 나갔다. 그의 명성은 급기야 중앙 정계로까지 알려졌다.

 

1538년 조정에서는 그에게 헌릉참봉이라는 말단 참봉자리를 제안했다. 명분은 재야 지식인을 등용하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왕실 무덤이나 지키는 자리였다. 그는 이 제안을 뿌리쳤다. 혹자들은 관직 자리가 낮아 거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조식은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물리쳤다.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던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조식의 명성을 듣고 만남을 청했으나, 이 또한 피했다. 높은 벼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시골처사가 마치 벼슬자리를 구걸해 보이는 오해라도 받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날로 혼탁해져가는 세상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식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번번이 사양했고, 1553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퇴계 이황의 권고도 물리쳤다.

 

 

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로서 실천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실천철학이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의였다. 1561년 조식은 김해에서 다시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이사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로 말년을 보냈다. 오덕계·정한강·곽재우·정인홍 등 수많은 인재들이 그와 인연을 같이 했다.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세력이 활보하던 명종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식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졌다. 새로운 세상이 온 듯 했으나, 조식은 이마저도 사양했다. 1572 2월 남명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이지 묻자, 조식은 처사(處士)’라 하라고 답했다. 그가 지향했던 삶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제자 가운데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 많이 나왔던 것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남명 조식의 정신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명 그의 수제자들과의 만남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조식과 정인홍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인홍은 합천 사람이다. 유년 시절에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조식이 지조가 보통 아이와는 다른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굳은 마음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하여 밤이나 낮이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혼매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이르러 방울(성성자)은 김우옹에게, (경의검)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하였다.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6 5 1)

 

조식은 일찍이 덕원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다.’라 하면서 분신처럼 정인홍을 아꼈다고 한다. 조식은 죽기 직전 평소 차고 있던 칼인 경의검(敬義劒)을 정인홍에게 전해 줄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을 두터이 했고, 정인홍은 평생 의리를 지키며 스승에 화답했다

 

 

문정왕후를 과부라 칭하다

 

1555년 조식은 조정으로부터 단성현의 현감자리를 제안 받았다. 그간 윤원형을 비롯한 간신들이 가득한 조정에 나갈 마음이 없었던 그에게 사양하기 힘든 벼슬자리가 단성현감이었다. 조정은 조식의 거주지와 그리 멀지 않은 단성현의 현감자리라면 사양할 명분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조식은 이마저도 사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국왕을 향해 그간 가졌던 재야인사로서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이것이 곧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이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직상소를 받아본 국왕은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명종이었다.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명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친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피붙이인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했고, 급기야 임꺽정의 난과 왜구의 침략 등 국내외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혼란기에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민초들이었다.

 

조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비를 향해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뿐이다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겼다. 그는 국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다. 왕이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 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했다.  이 이후로 온 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학문적 라이벌, 남명과 퇴계

 

우리 역사에서 16세기는 지방을 토대로 한 이른바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성장한 시기다. 이들 세력들은 지방에 따라 학문적 차이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이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지리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영남우도와 영남좌도를 대표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이 두 학파의 차이점이 잘 지적되어 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를 앞세웠다.”

 

이익은 지리산 아래에서 출생한 남명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의를 사랑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했다. 반면 퇴계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하다고 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조식은 퇴계학파의 성리학논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퇴계학파가 현실 인식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고, 반면 이황은 조식이 유학 이론에 깊지 못하다고 평했다.

 

학문적으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라이벌이었다. 경상도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다. 정구·김우옹·정탁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조식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경우 이황을 비판한데다가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처형당하면서 조식의 명망이 퇴계에 비해 빛을 잃게 되었다. 훗날 정조(正祖) 영남에서 절의 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조식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다.”고 평했다.

 

1571년에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조식은 눈물을 흘리며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하였다. 이 말처럼 조식 또한 일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일설에 따르면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이황의 유언을 들은 조식이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한다.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정서와 함께 그 시대 사화(士禍)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경의(敬義)를 학문의 실천지표를 삼은 인물이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의병장 출신에는 조식의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조식의 핵심 사상인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명정신을 대변하던 제자 정인홍이 반역으로 처형되면서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한 남명 조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발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황(李滉, 1501~1570) 동방의 주자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의 토착화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며, 당대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의 활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한 유형, 의리 탐구에 주력

 

조선시대에는 많은 지식인이 활동하였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략 이 시대 지식인은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학문에 침잠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는데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현실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을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내면 수양의 기초가 되는 심성의 탐구에 주력하였다.

 

2. 의리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남영 조식(曺植)과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내면의 수양을 전제로 축적된 학문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들이었다.

 

3. 국가 경영의 경륜을 실천했던 인물들로, 조선 전기에 양성지(梁誠之)를 비롯해 김육(金堉)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 경륜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들이다.

 

다만, 당대 지식인을 반드시 어느 한 부류에 속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앞서 제시한 이이의 경우 의리의 추구에 주력하면서도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하며 자신의 경륜을 제시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분류는 경향성의 파악을 위한 편의적인 것일 뿐이다. 이 같은 3가지 분류에서 이황은 첫 번째에 해당되는 인물로, 철저하게 의리의 탐구에 치중하였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었다.

 

 

퇴계학의 완성 과정

 

경상도 예안 온계리에서 출생한 이황(연산군 7 1501), 12살이 되던 해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주역]에 한 때 몰입하기도 하였으나,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는 [심경부주]에 심취하였다.

 

[심경부주]는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에 정민정(程敏政)이 주석을 붙인 책으로, 인간의 마음 이해를 위한 성리학자의 필독서였다. [심경부주]에 대해서 당시 대부분 사람이 구두조차 떼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이황은 문을 닫고 여러 달 연구한 끝에 대강을 이해할 수 있었다”([퇴계선생언행록])고 한다.

 

 

이후 이황은 홍문관수찬이나 성균관사성 등의 관직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더욱 학문에 침잠, 43살이 되어서는 주자학의 정수인 [주자대전]을 입수하였다. [주자대전]은 주자의 저술인 [근사록]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이 망라된 것으로 주자학의 백미 중에 백미라 하겠다.

 

[주자대전]을 통해 주자의 저술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였던 이황은 이후 성리학 관련 다양한 저술을 내놓은 한편 학문적으로 완숙기였던 59살 때에는 33살의 어린 기대승과 사단(四端: )과 칠정(七情: )과 관련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황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한편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기대승의 의견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황이 이처럼 마음이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관심을 둔 데에는 당대의 철학적 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면 도덕성 회복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된 것이었다. 당대뿐 아니라 앞 시대 집권세력에 의해서 자행되던 정치 사회적 비리나 폐단을 목격한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해답이라 하겠다.

 

 

예안향약을 통해서 이황은 농민의 유망을 막아 향촌사회를 안정화시키려고 하는 한편 그가 평생 공부했던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불손한 자를 극벌로 다스린다든지, 친척과 화목하지 못한 자를 중벌로 다스린다는 조항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밖에도 그는 다가오는 사림의 시대를 주도할 사림의 육성에 치중하였는데, 이때 주목한 것이 서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은 1543(중종 38)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인데, 이 서원의 설립 당시 주된 기능은 고려시대 유학자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安珦)의 제향이었다.

 

그런데 이황은 1550(명종 5) 풍기군수로 내려갔을 때,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중앙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 서원을 단지 제향 만하는 공간이 아닌 사림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 수양을 하는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초기 서원이 중시했던 제향 기능을 부수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황은 이를 계기로 서원보급운동에 주력하여 상당수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황의 이런 활동을 통해서 이른바 조선 서원의 전형이 완성되었거니와, 이황은 서원을 통해서 다가오는 시대에 국가 경영이나 사회 운영을 주도할 사림들을 육성하려고 하였다.

 

한편 이황은 말년에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바쳤다. [성학십도]는 그림을 통해서 성리학의 정수를 표현한 것으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군주학인 성학(聖學)을 제시하였다. 선조가 유학에서 성인이라 말해지는 요순(堯舜)처럼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사림의 시대, 사회운영 원리를 제시

 

역사학계에서는 16세기 후반 이후의 시기를 사림의 시대라고 하고 있다. 사림이 정치나 사회 등 제 분야에서 주도층으로 등장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황은 바로 이런 사림의 시대에 국가나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논리를 제공한 인물로, 그의 학문적 업적과 함께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황은 먼저 향촌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예안향약을 제정하였다. 예안향약은 그의 고향인 예안현 농민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유망(流亡)함으로써 향촌사회가 피폐해짐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것이었다.

 

 

 

동방의 주자로 추앙

 

이황의 이상과 같은 학문적 또는 사회적 활동은 비리와 부패로 점철된 시대를 청산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림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문인 조호익은 이황을 평하여,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라고 하였다. 가히 동방의 주자라 할 만하다.

 

이황의 학문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며 확산되면서 이른바 퇴계학파라는 조선조 학파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비록 이후 시기 그의 문인이나 후학들이 정치적으로 당대 주도세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대부분 논자들이 성리학의 정수로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문집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내 주자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가 탐구하려고 하였던 큰 주제가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것이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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