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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조의제문, 무오사화(戊午史禍)의 시발

역사/기타

by 덱스트 2022. 8. 31.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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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戊午史禍)

 

1. 시대적 배경

조선은 성종(9대 왕)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소인배로 멸시,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 : 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스스로를 높임.)의 경조부박(輕佻浮薄 : 언어 행동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함.)한 야심배라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이로써 두 세력은 자연 각각의 주의와 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일마다 대립하였다. 그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진전되어 갔다.

신구 대립인 신진사류와 훈구파의 갈등을 종래에는 양파의 사상적·정치적인 이념의 차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사회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면모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학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세종대 이후 사전(私田)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사유화 진행은 과전법의 모순을 노정시켰다.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은 일반 서민의 경제 생활을 압박하고, 나아가 신진사류의 경제 생활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성세력인 훈구파는 인척과 정실 등에 의해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농단해 신진사류의 진출을 음양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사회의 모든 모순에 직면해 그 부조리를 시정, 개혁하려는 사림파와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류 인사를 등용해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호학숭문(好學崇文) 정신에서 결과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2.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배경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 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는 한편,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앞서 김종직은 유자광(柳子光)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리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그의 시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柳子光)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극돈(李克墩)과 유자광(柳子光)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이 즉위해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李克墩)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돈(李克墩)은 이 때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문제삼고자 그 사실을 유자광(柳子光)에게 알렸다.

유자광(柳子光)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柳子光)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표연말(表沿沫)·홍한(洪瀚)·정여창·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귀양을 갔다.

이종준(李宗濬)·최보(崔潽)·이원(李黿)·이주(李胄)·김굉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모두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어 봉수(烽燧)와 노간(爐干 : 관청의 횃불을 관리하는 일)의 역을 지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이극돈·유순(柳珣)·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홍귀달(洪貴達)·조익정(趙益貞)·허침(許琛)·안침(安琛)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옥사로 많은 신진사류가 희생되고 주모자인 이극돈(李克墩)까지도 파면되었으나, 유자광(柳子光)만은 그 위세가 당당해 그 뜻을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특히, 신진사류는 많은 수가 직접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기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도 큰 사화를 여러 차례 더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해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선조대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 간신(姦臣)의 대명사 유자광(柳子光)과 임사홍(任士洪)은 누구인가?

3-1. 유자광(柳子光:1439년~1512년 ):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후(于後). 증조는 언(漹)이고, 할아버지는 두명(斗明)이며, 아버지는 부윤 규(規)이다. 서자 출신으로 기사(騎射)와 서사(書史)에 능하였고, 기개를 숭상하였다.

갑사(甲士: 시위)로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난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종군했으며, 그 때 세조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선략부호군(宣略副護君)이 되었고, 서자로서 벼슬길을 허통(許通: 태종 때 부터 서자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법령 발표)받게 되었다. 돌아와서 종군하는 데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1468년에 세조가 세자와 더불어 온양으로 행차할 때 총통장(總筒將)으로 호위하였고,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이어 호송관(護送官)으로 유구국(琉球國:현재의 오키나와) 사자를 호송하였다. 이 해에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에는 응양장군(鷹揚將軍)에 봉해졌고, 열무정(閱武亭)에서 진법을 훈련하는 데 중상대장(中廂大將)이 되었다. 또한 예종은 그를 익대공신으로서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올리게 하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했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게 하는 등 친히 교서를 내려 그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그의 반인(伴人)이 난언을 고함으로써 서소(西所)에 구금될 처지에 놓였으나 대왕대비의 비호로 풀려났다. 그 뒤 숭정대부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한 것이 드러났으나 임금이 죄를 묻지 않았고, 1477년에는 대신들이 서얼인 그를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를 도총관으로 삼을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78년(성종 9)에는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다 실패하여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유자광(柳子光)은 사직에 공이 있으니, 공신녹권을 특별히 돌려 주라.”는 명에 의해 공신의 봉작만은 회복받았다. 1485년에는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이듬해에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7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또 등극사(登極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8년에는 북경에 갔을 때 구매했던 ≪역대명신법첩 歷代名臣法帖≫을 올렸고, 또 의주 및 동팔참(東八站)·요동·광녕(廣寧) 등지에 있는 산천·도로의 형세와 지도(地圖)를 바쳤다. 1489년에는 장악원제조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의 행향사(行香使)가 되었으며, 1491년에는 황해도체찰사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에는 무령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에는 겸도총부도총관, 숭록대부 무령군에 제수되었다.

이극돈(李克墩)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에 자신의 나쁜 일을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유자광에게 의논하자 곧바로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이 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로써 특별히 칭찬한 뒤에 남쪽 빈청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였고, 이에 옥사를 직접 맡았다.

또한 그는 <조의제문 弔義帝文>에 직접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이 알기 쉽게 했고, 또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걷어다가 빈청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나아가 1498년에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사초사건과 관련지어 크게 제거하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후부터 유자광의 권세가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게 되었다. 한때 1504년(연산군 10)에는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임사홍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군대에 편입함)되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는 성희안(成希顔)과 인연이 있어 다시 훈열(勳列)에 참여하게 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고,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대광(大匡)으로 제수되어 충훈부당상이 되었으나 계속되는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중법에 처해져 마침내는 훈작을 삭탈당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평해로 옮겨졌고, 정국공신의 호(號)마저 삭제당했으며, 그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1512년(중종 7)에 눈이 멀다가 유배지에서 죽었으나, 이듬해에 ‘익대공신은 그 자신이 애쓴 공로이니 정국공신은 되돌려 주지 않더라도 익대공신만은 되돌려 주라.’는 조치가 있었다.


3-2 임사홍(任士洪: 1445년 ~ 1506년 ) :

본관은 풍천으로 그의 6대조 임자송은 친원파이다.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이다. 신수근 등과 함께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연산군 에게 알려 갑자사화(甲子士禍: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연산군이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었다.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성종은 성종비 윤씨가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1479년 폐비하고 사사했다.

임사홍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이와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을 보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고 성종 묘에 배사했다.

이어 연산군은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제거하려 획책하였고 폐위 사건 당시 이에 찬성한 자들을 찾아 제거했다. 폭력적인 사화 이후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와 폭정의 피해가 심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반격(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의 빌미를 제공한다.

음서로 출사한 뒤 사재감사정과 사직을 거쳐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작위는 풍성군(豊城君)이다.

조선 왕실의 인척이자 겹사돈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의 손녀이며 보성군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으며, 그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두 임금의 사돈이기도 했다.

다른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사림파 정치인이었다. 관료생활 초반 한명회를 규탄하는 등 소신으로 활동하다가 1478년의 흙비 문제를 놓고 금주와 근신을 주장하는 대간에 대해 대단하지 않은 변고에 술을 금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했다가 언관들과 갈등하다 12년간 유배상활을 했다.

이후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한어를 가르치다가 이조판서(吏曺判書), 병조판서, 숭정대부가 되었다가 1504년 풍성군에 봉해지고,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종반정 직후 살해된 뒤 20일만에 부관참시당했다. 글재주에 능하여 많은 신도비와 묘비명을 썼고, 저서와 작품을 남겼으나 묘비명을 제외한 작품들은 대거 실전되었다.

그 뒤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폐비 윤씨 추숭 문제를 놓고 사림파(士林派)와 갈등하던 연산군에게 유자광, 신수근 등과 함께 장흥군부인 신씨와의 상봉을 주선한다.

사림파를 해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설이 통설로 제기되어 왔으나 갑자사화 때는 그를 변호하던 훈구파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은 처조카 이심원만이 유일했으므로 1970년대 이후 궁중파대 부중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었다. 셋째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김종직의 제자였고, 연산군과 중종 때의 사림파 정치인 남곤(南袞)은 그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1477년(성종 8년)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이때 유자광과 결탁,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자신의 조카사위이며,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승정원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사주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던 과부 조씨는 중매를 통해 김주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의존하던 친정오라비와 형부는 조씨의 재산이 김주에게 넘어가는 것을 염려하여, 조씨를 폭행하면서까지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들은 김주가 조씨를 강간했다고 소장을 제기하였으나 무고임이 드러났고, 이들은 여러 관청에 뇌물을 바쳤다. 이들에게 뇌물을 받은 승정원의 한확은 도승지 현석규를 제외한 다른 승지인 임사홍, 홍귀달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동부승지 홍귀달이 최종 결정을 내려 '김주라는 사내가 조씨의 집에 기숙하는 것을 보았으니 오라비 된 입장에서 강간으로 오해할 수 있다'며 그들을 변호하였다.

그런데 이때 도승지 현석규가 자신만 빼놓고 결정한 것에 분노하여 홍귀달과 싸움이 붙었다. 화가 난 성종은 승지들을 모두 해임했고 그도 이때 체직되었다. 그러나 현석규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성종은 오히려 현석규를 4자급을 승진시켰고, 얼마 뒤 임사홍이 도승지직에 오르게 된다.

김언신에 이어 유자광이 직접 현석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성종은 이를 붕당을 만들어 자기 편을 옹호한 일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뒤에 이 일이 임사홍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승정원 도승지로 재직 중인 1478년(성종 9년) 4월 비가 많이 쏟아졌는데, 흙으로 된 흙비가 내리는 변괴가 생겼다.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술을 일절 금지해야 한다는 합동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임사홍은 지나치게 강경해진 대간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때 임사홍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변괴인데, 이제 곧 국가의 제사가 연이을 지금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대단하지 않은 변괴를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 왕과 승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삼사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이때 임사홍이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를 하였다.

삼사는 곧바로 임사홍을 맹렬하게 성토하였다. 그의 비판 중 술을 금해야 한다는 요구를 반대한 것은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겼다'는 혐의를 걸기 좋았고, 흙비의 중대성을 낮춰 보았으니 “하늘의 뜻을 우습게 알았다”고 비난하기 알맞았다. 임사홍이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이며 두 아들이 예종과 성종의 사위로서 왕실의 겹사돈이었던 점은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태종이 세운 조선 정치론의 원칙에 부합하였다. 언관들의 맹렬한 성토로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아무도 그를 나서서 구제하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1월 통정대부 이조참의, 4월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었으나 언관들로부터 계속 공격당했고, 그해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곧 며느리인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유배에서 풀리지만, 조선 성종 재위 기간에는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가 몰락하자 그의 주변에 오던 친구들도 왕래를 끊었고 그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글과 서예를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그 뒤 성종의 특별 지시로 1488년 11월 절충 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대간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 임사홍이 워낙 총애하던 신하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스스로도 임사홍의 혐의라는 것이 의심스러워져서이기도 했다

그는 한학과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1490년(성종 2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계속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성종 23년) 2월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사헌부와 사간원이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동안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성종 2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공신적장자에 대한 가자로 1계급 승진하여 가선대부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년) 4월 가선(嘉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이때 대간이 그의 가자가 부당하다고 논박하였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월 다시 가선 대부 상호군(嘉善大夫上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 그 아들 임숭재가 부마(駙馬)로 임금의 총애를 얻자, 그 연줄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가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당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희재는 뒤에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사화 이후 그는 방방곡곡을 다니며 얼굴 반반한 여자를 찾아내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낀 그는 이를 모욕적인 대우라고 여겨 연산군이 부여한 채홍사 일을 태만하게 하였다.

연산군은 그가 미녀를 데려오는 실적이 신통치 않음을 지적하며 "다 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에서 구해줬거늘, 쓸모없는 늙은이가 은혜도 모르는구나" 하며 경연장에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임사홍은 사화 이후 정식으로 등용되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결코 조정의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 임무는 여전히 글씨 쓰기와 묏자리 알아보기, 그리고 채홍사로서 지방을 다니며 미인들 모아오기였다.

그가 채홍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후대에 간신으로 손가락질받게 되는 근거의 하나인데, 사실 그가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미인이 많다고 소문난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고 보냈더니 뽑기는 뽑았지만 기준에 두루 맞는 미인이 하나도 없어 안되겠다는 보고를 올린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피하다가 마지못해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연산군은 벌컥 성을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

“ 이미 뽑았다면 거느리고 와서 복명(復命)함이 옳거늘, 달랑 보고만 올리는 것이 무엇이냐? 전에 사홍이 여러 사류(士類)에게서 배척을 받기 거의 수십년에, 내가 특별히 임용하여 마치 물에서 건지고 불에서 구해준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야 하거늘! 사홍은 약간의 재주가 있다고 하나 덜 떨어진 자이다."

이후에도 그는 채홍사를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가 이극균과 친했던 점을 언급하며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즉위 직후 사초의 기록을 우연히 찾아 본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생모가 아니며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려는 사업을 시도했고, 이때 사림파 관료들은 선왕 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했다. 이때 임사홍은 신수근, 유자광 등과 함께 폐비 윤씨의 생모 장흥군부인 신씨를 연산군과 만나도록 주선한다. 임사홍은 신수근과 함께 궐내에 출입하던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에게 선을 댔다.

생모의 사사 외에 외할머니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연산군은 임사홍을 통해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를 만났고 신씨가 전해 준 피묻은 적삼을 보고 이성을 상실했다.

그의 세 아들 중 총명했던 셋째 아들 임희재는 연산군의 살육을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임사홍은 아들 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과 은총을 더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이라며 경계하였다.

1504년 이후로는 앞서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부관참시(斬屍)하였다. 후대의 사림파들이 기록한 실록의 평가에 의하면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세 신씨(愼氏), 즉 신수근·신수겸·신수영 형제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고 한다.

그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아들 희재를 잃었다. 임희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아버지 임사홍과 관련된 추문을 극복하고 장원급제를 하기도 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임희재는 집 병풍에다가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기며 그의 폭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 연산군이 어느 날 임사홍의 집에 찾아갔다가 이 병풍을 보고 격노했다. 그리고 임희재를 죽이겠다고 하자 임사홍이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불초하여 제가 먼저 처치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이 죽던 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다.그날 저녁에야 연산군 일행이 떠나간 뒤 세인의 이목을 피해 대성통곡했다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임희재가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연산군에게 그가 참소하여 죽이게 했다 한다.  최용범은 이 설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희생된 이목의 도당으로서, 이목의 집을 수색했을 때 시국을 비판하는 임희재의 편지가 나왔기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적혀 있다.

임사홍 자신도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

임사홍보다 연산군에게 더 가까웠던 또 다른 아들 임숭재 역시 연산군에게 농락당했다. 임숭재는 개인적으로 미인을 알선해서 연산군에게 공급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의 부인도 있었다.

결국 폐비 윤씨의 복권으로 만족하려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살육극으로 번져나갔다.

총명한 사람이던 임사홍은 이런 파행의 세월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구의 그 날이 오면 자신이 먼저 희생될 것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주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도 책임의 일부를 쓰고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았다.  그는 사회가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래서 풀려난 야만성에 희생되기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 희재, 사촌 동생 남곤 등이 연루되었으나 아무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을 추국하는 형관이 되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였다.

1504년,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을 보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디. 특히 무오사화때, 이전에 당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사림파들을 일망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아들인 임희재도, 외사촌 동생인 남곤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6월 자헌 대부(資憲大夫) 풍성군(豊城君)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7월초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이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판서에 이르렀지만 사림파로부터 연산군의 악행과 폐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인물로 지목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495년에는 아들 임광재를 1505년 아들 임숭재를 병으로 잃었다.

1504년 8월초 그의 집에서 병이 나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가자되어 8월 16일 종1품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아 숭정대부 병조판서(崇政大夫兵曹判書)가 되었다.

1505년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원접사직을 사양하는 바람에 그가 원접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0월 병조판서로 연산군에게 건의하여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에게는 가족을 데리고 함께 부임할 수 있게 배려해줄 것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그 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이 역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편의를 봐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6년 4월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므로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4월말 중국 사신에게 결례를 범했다 하여 국문을 당하였다.

7월 20일 우참찬으로 승진 7월 29일에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8월 17일 지사로 전임하였다가 닷새만에 예문관의 제술을 맡아보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작품으로는 광주의 서거정의 묘비명, 금천의 노사신의 신도비문, 양주의 박중선묘비문, 광주의 이계손묘비명, 한확 묘비명, 연천의 영원윤호묘비명, 월산대군의 비명 등이 전한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 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붙잡혀 격살되었다. 향년 62세였다. 그의 시신은 서둘러 여주군 능현리 선영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에 새 임금 중종에게 의금부가 아뢰기를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적몰가산(籍沒家産)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부관참시되었고, 후에 누군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4.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金宗直:1431년~1492년 )은 누구인가?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 토착성씨로서 벼슬을 한 가문)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밀양박씨 가문에 박홍신의 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5. 弔義帝文(조의제문: 의제
(義帝)를 조문하는 글)


丁丑十月日(정축십월일) : 정축 10월 어떤 날

余自密城道京山(여자밀성도경산) : 나는 밀성(밀양)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宿踏溪驛(숙답계역) :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夢有神披七章之服(몽유신피칠장지복) :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頎然而來(기연이래) :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自言(자언) : 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孫心爲(초회왕손심위) : 나
 초희왕의 손자 심인데

 

西楚霸王所弑(서초패왕소시) :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沈之郴江(침지빈강) : 빈강(郴江)에 잠겼다(버려졌다).”

因忽不見(인홀불견) : 그래서 (날) 볼 수가 없다...

余覺之(여각지) : 나는 꿈을 깨어

愕然曰(악연왈) : 놀라며 이르기를

懷王南楚之人也(회왕남초지인야) :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余則東夷之人也(여칙동이지인야) : 나는 동이 사람인데..

地之相距(지지상거) : 서로가 떨어진 거리가

不啻萬有餘里(불시만유여리) :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而世之先後(이세지선후) : 그와 나의 앞, 뒤가 세대가 

亦千有餘載(역천유여재) : 또한 천 년이 넘는데

來感于夢寐(래감우몽매) :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玆何祥也(자하상야) :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且考之史(차고지사) :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無沈江之語(무침강지어) :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豈羽使人密擊(기우사인밀격) :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而投其屍于水歟(이투기시우수여) :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是未可知也(시미가지야) : 이것을 알 수 없으니 

 

遂爲文以弔之(수위문이조지) : 마침내 문을 지어 조문한다.

惟天賦物則以予人兮(유천부물칙이여인혜) :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孰不知尊四大與五常(숙불지존사대여오상) : 어느 누가 사대(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오상(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오륜(五倫)의 뜻)을 높일 줄 모르리오.

匪華豐而夷嗇(비화풍이이색) : 중화라서 (사대와 오상이)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曷古有而今亡(갈고유이금망) :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故吾夷人(고오이인) : 하여.. (중화인이 볼 때)나는 오랑캐 땅에서 태어낳고(오랑캐인이며)

又後千載兮(우후천재혜) : 또 천 년을 뒤졌건만

恭弔楚之懷王(공조초지회왕) : 삼가 초 회왕(초나라 38대 군주 웅괴(熊槐), 초나라는 44대 창평군(昌平君) 웅계(熊啓) 때 나라가 망한다.)을 조문한다

昔祖龍之弄牙角兮(석조룡지롱아각혜) : 옛날 조룡(진시황) 아각(상아나 코뿔소 뿔)을 가지고 노니(포악하니)

四海之波(사해지파) : 사해(四海)의 물결이

殷爲衁(은위황) : 붉어 피가 되었어라

雖鱣鮪鰍鯢(수전유추예) : 비록 전유(잉어와 붕어) 추애(다랑어, 미꾸라지,도롱뇽)일지라도

曷自保兮(갈자보혜) : 어찌 보전하겠는가?

思網漏而營營(사망루이영영) : 그물(진나라의 폭정을 피해)을 벗어나려고 안감힘을 다하였으니..

時六國之遺祚兮(시륙국지유조혜) : 당시 육국(전국(戰國) 7웅(雄) 중 진(秦)나라를 제외한 여섯나라 연(淵),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초(楚))의 후손들은

沈淪播越(침륜파월) : 숨고 도망가서

僅媲夫編氓(근비부편맹) : 겨우 편맹(일반 백성)이 되었다오.

梁也南國之將種兮(량야남국지장종혜) : 항양(項梁: 초(楚) 나라의 명장(名將)인 항연(項燕)의 아들이며 항우(項羽)의 숙부(叔父)이기도 한데, 그가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진섭(陳涉) 다음으로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일으키어 진군(秦軍)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민간에서 찾아다가 초 회왕으로 삼았었는데, 초 회왕은 뒤에 다시 항우에 의해 의제(義帝)로 추대(推戴)되었다가 끝내는 항우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踵魚狐而起事(종어호이기사) : 어호(魚狐: 물고기와 여우)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求得王而從民望兮(구득왕이종민망혜) :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存熊繹於不祀(존웅역어불사) : 끊어졌던 웅역(熊繹: 초나라 1대 군주)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握乾符而面陽兮(악건부이면양혜) : 건부(乾符: 건부곤진(乾符坤珍)의 약자. 천지가 제왕(帝王)을 돕는 상서(祥瑞: 좋은 조짐)를 말한 것)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天下固無大於芉氏(천하고무대어간씨) :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초나라 군주의 성(性))보다 큰 것이 없었다.

遣長者而入關兮(견장자이입관혜) : 장자(長者: 관후장자(寬厚長者)의 준말로, 즉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데, 그가 처음 초 회왕으로부터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우(項羽)와 길을 나누어서 진(秦) 나라를 공략하여,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가 진왕 자영(秦王子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관중을 조용히 평정하였던 일을 이른 말이다.)를 보내어 관중(진나라 수도 함양을 둘러산 4개의 관문을 말하는데 동쪽으로는 동관(潼關: 함양을 북쪽을 흐르는 위수와 황하가 만나는 곳), 남쪽은 무관(武關), 서쪽은 대산관(大散關), 북쪽은 소관(肅關)의 공간이 관중(關中)이다.)에 들어가게 함이여

亦有足覩其仁義(역유족도기인의) :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羊狠狼貪(양한랑탐) : 늑대가 양을  물어뜻듯이 탐하는

擅夷冠軍兮(천이관군혜) : 관군(冠軍: 초 회왕의 상장군(上將軍)인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가리키는데, 그는 항우에게 기습 살해당하고 멸족(滅族)까지 당하였다.)을 평정하였구나

胡不收而膏齊斧(호불수이고제부) :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 징벌하는 도끼. 천하를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嗚呼(오호) : 아아,

勢有大不然者兮(세유대불연자혜) :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吾於王而益懼(오어왕이익구) :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爲醢腊於反噬兮(위해석어반서혜) : 반서(反噬: 배반)를 당하여 해석(醢腊: 시해를 당했음)이 됨이여

果天運之蹠盭(과천운지척려) :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郴之山磝以觸天兮(빈지산오이촉천혜) :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景晻愛以向晏(경엄애이향안) :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郴之水流以日夜兮(빈지수류이일야혜) : 빈(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波淫泆而不返(파음일이불반) :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天長地久(천장지구) : 천지가 장구한들

恨其可旣兮(한기가기혜) : 한이 어찌 다할까

魂至今猶飄蕩(혼지금유표탕) :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余之心貫于金石兮(여지심관우금석혜) :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王忽臨乎夢想(왕홀림호몽상) :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循紫陽之老筆兮(순자양지로필혜) :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思螴蜳以欽欽(사진윤이흠흠) :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擧雲罍以酹地兮(거운뢰이뢰지혜) :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冀英靈之來歆(기영령지래흠) : 바라기는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위 조의제문에 숨겨져 있는 김종직의 내면의 비밀은 다음과 같다.

조룡(祖龍)이란 진 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 종직(宗直)이 진 시황을 세조(世朝)에 비유한 것이고, ‘왕(王)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는 데의 왕은 바로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가리키는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로 삼았으므로, 종직이 의제(義帝)를 노산(魯山 = 단종)에게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종직이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제멋대로 관군(冠軍)을 멸족시켰다.’고 하였는데, ‘양(단종)을 이리(세조)가 탐(왕위)하여 물어뜻듯이’는 것은 수양대군의 권력의 욕심을 가리킨 말이다.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다.’는 것은 곧 세조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 등을 멋대로 죽인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라는 것은 종직이 ‘노산(단종)이 어찌하여 수양을 군사를 풀어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의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 ‘배신한 자에게 시해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단종이 수양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양(紫陽)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서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한다.’는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로 자처하여 그의 마음에 이 부(賦)를 지어서 주자의 《강목(綱目)》에 비긴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이 그 글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奸臣)이 난(亂)을 획책함으로써 화기(禍機)가 거의 일어날 무렵에 역도(逆徒)들을 죽여 제거함으로 인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업(功業)이 높고 높으며 그 덕(德)이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종직이 자기 문도(門徒)와 더불어 성덕(聖德)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일손으로 하여금 그런 글을 사서(史書)에다 속여 기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생긴 일이겠는가. 남몰래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고서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참혹하고 두렵구나. 그 형명(刑名)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리하여 7월 27일에 반사(頒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죄인을 용서하는 것)하였다. 그 반사의 교지(敎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신무(神武)의 자용(姿容)으로 국가가 위의(危疑)스럽고 뭇 간신(奸臣)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때를 당하여 침착한 살핌과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함으로써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절로 붙일 곳이 있게 되었으니, 그 성신(聖神)한 공덕(功德)은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사업에 광채를 더하고, 자손(子孫)들을 도와서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끼쳐줌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날의 태평 성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품고 은밀히 당류(黨類)를 결합하여 흉악한 꾀를 부리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이를 문자(文字)로 드러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닿는 죄악을 용서할 수 없으므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그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

그리고 그의 문도인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서로 간악한 붕당(朋黨)을 지어 같은 무리끼리 서로 도와서 그의 글을 충분(忠憤)이 격앙된 바라고 칭미(稱美)하여 이를 사초(史草)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은 등급이므로, 모두 능지처참(凌遲處斬)하도록 하라.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 등과 함께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까지 속여 꾸며서 서로서로 말을 전하여 그것을 사초에 기록하였으니, 이목, 허반은 모두 처참(處斬)하고, 강겸은 결장일백(決杖一百)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보내서 노복으로 삼도록 하라.

표연말(表沿末), 홍한(洪翰),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 총(茂豐副正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하였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亂言)하는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모두 결장일백하여 유삼천리(流三千里)하도록 하라.

이종준(李宗準), 최보(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은 모두 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하여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國政)을 비난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기도 하였으니, 임희재는 결장일백하고, 이주는 결장일백하여 극변에 부처(附處)하라.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결장팔십하여 원방(遠方)에 부처하되, 이 유배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봉수정로간(烽燧庭爐干)의 역(役)을 정하도록 하라.

수사관(修史官) 등은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종(許琮)허종은 갑인년에 이미 죽었으니, 필시 허침(許琛)일 것이다.,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하라.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사유(事由)를 가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寡昧)한 사람으로 간당(奸黨)을 제거하고 나니, 두려운 생각이 이미 깊은 한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지금 7월 27일 어둑새벽 이전까지의 강도(强盜), 절도(竊盜) 및 강상죄(綱常罪)에 관계된 죄인 이외의 죄수들에 대해서는 형(刑)이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이들에 대하여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어(告語)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죄로써 벌줄 것이다.

아, 인신(人臣)은 군왕에 대하여 반역의 뜻도 품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미 부도(不道)의 죄를 받았으니, 천지(天地)가 풀리어 뇌우(雷雨)가 이르듯이 의당 새로운 은택을 널리 펴야 하겠으므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노니, 자세히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라. ……”


 
6. 김종직의 사면(赦免)


홍치 17년 갑자(1504)연산군 10년.

9월에 사화(士禍)가 재차 일어나서 김굉필, 박한주 등 여러 사람에게 가죄(加罪)하였다.
 

정덕(正德) 2년 정묘(1507)중종 대왕(中宗大王) 2년.

 
죄를 입은 제현(諸賢)들의 원통함을 추후하여 신설(伸雪)하였다. 이 때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梁), 대교(待敎)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검열(檢閱) 권벌(權橃)·이영(李泳)·정웅(鄭熊)·윤인경(尹仁鏡)·윤지형(尹止衡)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에 수사관(修史官)들이 한갓 사적인 혐오 때문에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은밀히 대신(大臣)에게 촉탁하여 그의 노염을 돋구고, 유자광(柳子光)이 따라서 이를 창화하여 함께 의논해서 밀계(密啓)함으로써 끝내 대화(大禍)를 불러온 것이니, 이는 곧 은밀히 과실을 가리려다가 끝내는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과실이 당일에 폭양(暴揚)되어 만세 후까지 누가 미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만세의 사가(史家)의 법칙을 훼손시키고 한편으로는 임금의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마음을 열어놓았기에, 그 죄가 의당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 상(賞)이 도리어 미쳤으니, 신들은 몹시 분개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요즘에는 모두 무오년의 화(禍)를 경계하여 사기(士氣)가 매우 꺾이었습니다. 신들은 김일손 등을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가의 법칙이 이로부터 모조리 폐해짐으로써 만세의 공론(公論)이 없어져버릴까 매우 염려하는 바입니다. ……”

하였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김종직, 김일손 등 사련(辭連)으로 죄를 입은 사람들은 과연 애매한 점이 있으니, 그들을 복관(復官)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추증(追贈)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의 추관(推官)인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상사(賞賜)한 물품과 무오년에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기청(日記廳)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밀양(密陽) 대동(大洞)의 구택(舊宅) 뒷산 경좌 갑향(庚坐甲向)의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상(上)이 특명으로 그 부인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고, 그 자손들을 찾아서 녹용(錄用)하도록 하여, 아들 숭년(嵩年)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연해서 제수되었다. 그러나 숭년은 화를 당한 나머지 명리(名利)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부인(母夫人)의 명령에 따라 사은(謝恩)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모친을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였으므로, 향인(鄕人) 및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 칭도하고 있다.

참봉은 주부(主簿) 손순무(孫筍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윤(府尹) 손영유(孫永裕)가 바로 그의 조(祖)이다. 아들 3인을 두었는데, 윤(綸)은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유(維)는 참봉 최필손(崔弼孫)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유(紐)는 지평(持平) 이신(李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선생의 문집(文集) 초본(抄本) 20여 권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오히려 남은 난고(亂稿)가 들보 위에 쌓여 있었는데, 가인(家人)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하여 이를 또 불 속에 던져버리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활활 타는 불 속에서 1, 2편(編)을 꺼냄으로써 겨우 완전히 태워버림은 면하였다. 그래서 지금 보존된 것은 10분에 2, 3도 안 되는데, 선생의 생질 강중진(康仲珍)이 이를 상자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인 경진년(1520, 중종15)에 읍재(邑宰)와 상의하여 판각(板刻)하도록 하였고, 남곤(南袞)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그리고 예조(禮曹)에서는 선생이 살았던 고을과 강도(講道)하던 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 가을의 중월(仲月)이면 관(官)에서 치제(致祭)할 일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니, 의정부가 계청(啓請)하여 상이 윤허했으므로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善山)의 자양서원(紫陽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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