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 계미 2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해주(海州)는 여러 해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의 사망율이 대개 5분의 1이나 되온즉, 그런 일(인육을 먹은 일)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고려(高麗) 5백 년 동안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는데... 마음에 심히 부끄럽다..."
『세종실록 119권, 세종 30년 1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
"양성지가 이르기를... 신이 전조(前朝)를 보건대, 원(元)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차라대(車羅大)·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모름지기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에 요(遼)와 금(金)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둘째에 이르기를) 전조[고려]에서는 42도부(都府)를 두고 정병(精兵) 12만 명을 양성했던 고로 능히 이웃 나라를 넘보게 되어, 비록 요(遼)와 금(金)이 서로 번갈아 중국에 들어가도 문정(門庭)에 근거(根據)되어 범(犯)하지 못하였삽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평정할 때도 정병 11만 명을 사용하였사오며, 정종(定宗) 때에 와서 거란(契丹)의 꾀를 듣고 30만 군졸을 가려 뽑아서 이름하기를 광군(光軍)이라 하였다가, 강조(康兆)가 거란을 막을 때에 30만 명으로 막았고,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패퇴(敗退)시킬 때에는 20만 명으로 물리쳤으며,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할 때에는 17만 명으로, 신축년(辛丑年)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는 20만 명을 사용하였사온데,
지금[조선]은 군사의 수효가 서울의 시위 군사(侍衛軍士)를 제외하면 군사가 겨우 10여 만이온데, 선군(船軍)이 일부분이고 시위 진군(侍衛鎭軍)과 수성군(守城軍)이 일부분이며... 선군(船軍)은 다른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또한 쓸 수 없고... 다만 시위 진군(侍衛鎭軍) 수만 기(數萬騎)만이 조발(調發)할 수 있는 군사입니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신 등은 일찍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고려(高麗)의 문종(文宗)이 세상을 융성하고 풍부하게 하였으므로...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22일 기미 3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때에는 밥을 먹이는 중[僧]이 3만 명이었으니, 당시에[고려]는 나라가 부유(富裕)해서 그렇게 했던가? 지금[조선]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12일 갑인 5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제도는 좋지가 못하다. 전조[고려]에서는 수십 만의 병력을 여러번 동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조선]은 수만의 병력도 모집할 수가 없으니, 이는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무변(武弁)이 부진한 것은 송(宋)나라의 말기와 같은데, 논의만은 대단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만 앞세우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였다."
『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30일 경자 3번째기사』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보진(鎭堡)을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나라[조선]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이양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조선]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경자 5번째기사』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조선]은 시시하게 보인다더니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흠영, 조선 후기 선비 유만주의 일기』
"고려는 송악에 도읍하여 거의 5백 년이 지나서 망하였다. 그런데 [고려의]그 전성 시대에는 군신이 서로 화합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였으니, 비단 성지나 궁궐, 누대가 그 위엄을 중하게 드러내 보이고 유람의 장소를 풍부히 제공했던 것뿐만이 아니었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나 호민부상(부유한 상인)들의 정원과 저택들은 자하동을 에워싸고 남산을 임하여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게다가 승사와 탑묘들이 기려함을 서로 다투어 금벽색의 고운 단청이 서로 휘황찬란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이성계)가 일어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자, 수년도 안 되어서 왕씨들의 겹겹으로 경영해 놓은 높은 대사와 깊은 오지들이 쓸어버린 듯이 다 없어져서, 동으로 만든 낙타상이 가시덤불 속에 묻히고 서리가 눈에 그득한 것이 지금까지 80여 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유민으로서 그 당시에 어렸던 사람들은 이제 늙어 꼬부라졌고, 당시에 장성했던 사람들은 벌써 묘목이 한 아름이 되었으니, 또 누구에게서 그 지난날의 번화했던 시절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 부귀영화를 쌓는 데는 500년도 모자랐으나, 모든 것이 허물어질 적에는 하루도 안 걸렸으니, 아아! 왕씨의 도읍은 바로 오늘날의 ‘은감’이 라고 할 만하도다!"
『점필재집 제2권, 김종직』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 계미 2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해주(海州)는 여러 해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의 사망율이 대개 5분의 1이나 되온즉, 그런 일(인육을 먹은 일)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고려(高麗) 5백 년 동안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는데... 마음에 심히 부끄럽다..."
『세종실록 119권, 세종 30년 1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
"양성지가 이르기를... 신이 전조(前朝)를 보건대, 원(元)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차라대(車羅大)·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모름지기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에 요(遼)와 금(金)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둘째에 이르기를) 전조[고려]에서는 42도부(都府)를 두고 정병(精兵) 12만 명을 양성했던 고로 능히 이웃 나라를 넘보게 되어, 비록 요(遼)와 금(金)이 서로 번갈아 중국에 들어가도 문정(門庭)에 근거(根據)되어 범(犯)하지 못하였삽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평정할 때도 정병 11만 명을 사용하였사오며, 정종(定宗) 때에 와서 거란(契丹)의 꾀를 듣고 30만 군졸을 가려 뽑아서 이름하기를 광군(光軍)이라 하였다가, 강조(康兆)가 거란을 막을 때에 30만 명으로 막았고,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패퇴(敗退)시킬 때에는 20만 명으로 물리쳤으며,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할 때에는 17만 명으로, 신축년(辛丑年)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는 20만 명을 사용하였사온데,
지금[조선]은 군사의 수효가 서울의 시위 군사(侍衛軍士)를 제외하면 군사가 겨우 10여 만이온데, 선군(船軍)이 일부분이고 시위 진군(侍衛鎭軍)과 수성군(守城軍)이 일부분이며... 선군(船軍)은 다른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또한 쓸 수 없고... 다만 시위 진군(侍衛鎭軍) 수만 기(數萬騎)만이 조발(調發)할 수 있는 군사입니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신 등은 일찍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고려(高麗)의 문종(文宗)이 세상을 융성하고 풍부하게 하였으므로...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22일 기미 3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때에는 밥을 먹이는 중[僧]이 3만 명이었으니, 당시에[고려]는 나라가 부유(富裕)해서 그렇게 했던가? 지금[조선]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12일 갑인 5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제도는 좋지가 못하다. 전조[고려]에서는 수십 만의 병력을 여러번 동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조선]은 수만의 병력도 모집할 수가 없으니, 이는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무변(武弁)이 부진한 것은 송(宋)나라의 말기와 같은데, 논의만은 대단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만 앞세우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였다."
『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30일 경자 3번째기사』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보진(鎭堡)을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나라[조선]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이양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조선]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경자 5번째기사』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조선]은 시시하게 보인다더니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흠영, 조선 후기 선비 유만주의 일기』
"고려는 송악에 도읍하여 거의 5백 년이 지나서 망하였다. 그런데 [고려의]그 전성 시대에는 군신이 서로 화합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였으니, 비단 성지나 궁궐, 누대가 그 위엄을 중하게 드러내 보이고 유람의 장소를 풍부히 제공했던 것뿐만이 아니었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나 호민부상(부유한 상인)들의 정원과 저택들은 자하동을 에워싸고 남산을 임하여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게다가 승사와 탑묘들이 기려함을 서로 다투어 금벽색의 고운 단청이 서로 휘황찬란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이성계)가 일어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자, 수년도 안 되어서 왕씨들의 겹겹으로 경영해 놓은 높은 대사와 깊은 오지들이 쓸어버린 듯이 다 없어져서, 동으로 만든 낙타상이 가시덤불 속에 묻히고 서리가 눈에 그득한 것이 지금까지 80여 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유민으로서 그 당시에 어렸던 사람들은 이제 늙어 꼬부라졌고, 당시에 장성했던 사람들은 벌써 묘목이 한 아름이 되었으니, 또 누구에게서 그 지난날의 번화했던 시절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 부귀영화를 쌓는 데는 500년도 모자랐으나, 모든 것이 허물어질 적에는 하루도 안 걸렸으니, 아아! 왕씨의 도읍은 바로 오늘날의 ‘은감’이 라고 할 만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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