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남풍(賈南風). (257~300)
진나라 2대 황제인 혜제 사마충의 황후.
1. 황후가 될 때까지
257년, 가충과 두번째 부인 곽괴 사이에서 삼녀로 태어났다. 가남풍의 모친 곽괴는 황후 양지의 시종에게 뇌물을 주고 딸이 태자비가 되도록 공작을 벌였는데, 그덕에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태자비가 된다.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데, 당시 황태자였던 사마충이 역사에 길이 남는 백치 병신이라는 것, 그래서 멀끔한 여자를 황태자비로 들이면 도저히 이 황태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실제로 마지막까지 태자비 후보로 저울질된 것은 가충의 딸 가남풍과, 위관의 딸이었는데, 진무제 사마염은 며느리로 풍채 크고 피부가 곱고 하얀 지혜로운 위씨를 원했다. 반대로 피부도 검고 더럽고 얼굴도 못난 가남풍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황제는 어질고 지혜로우며 관상도 좋은 위씨 딸을 황태자비로 하겠다며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때 황후가 미리 뇌물을 받고 권신인 순의, 순욱을 포섭해 놓았으므로 그들은 가남풍이 더 좋다고 대꾸한다.
주장인즉, 문제의 "미인 아내 들이면 못 견디고 바람난다"논리였다.
가남풍은 추녀여도 보통 추녀가 아니니 백치 남편이라도 어떻게 안 견디겠냐는 거였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긴 했는지 황제는 신하들의 뜻대로 위씨 대신 가씨를 선택하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2. 숙청 그리고 또 숙청
1대 황제 사마염 사후 외척 양준(황태후의 아버지)은 권신이 되어 권세를 자행한다. 그는 황제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노골적으로 역심을 드러냈다. 죽기 전 궁안의 신하를 모두 제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들키기도 했고, 황제에게 불호령을 듣기도 했으나 그뒤 황제가 바로 쓰러져버려 양준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마염 사후 양준은 황제의 당부를 받았다고 사기를 치며, 외척 중 가장 명망있는 어른인 사마염을 견제하고 자신이 조정을 장악하였다.
멋대로 선황의 유지를 바꿔치고 백치 황제의 섭정이 되려는 양준의 노골적 야심은 가남풍의 심기를 건드렸다.
백치 황제가 백치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황후인 자신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선황은 여남왕 사마량에게 섭정을 맡기려 했지만, 양준이 사마량을 밀어내고 조정을 장악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양준만 죽인다면 가남풍이 국가대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남풍은 다른 사마씨들에게 밀서를 보내 부추긴다.
함께 외척 양준을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이 초왕 사마위다. 사마위는 이제 막 스무살을 넘긴 패기 넘치는 자로 사마염의 5남이자 백치 황제의 동생이었다. 그는 좋다고 올라와 양준을 쳐죽이고 가남풍과 손을 잡는다. 사마위는 병권을, 가남풍은 정권을 잡는다.
가남풍은 평소 거슬렸던 시어머니 양지를 폐서인하고 그의 친모를 처형한다. 양지는 예전에 뇌물을 먹고 가남풍을 뽑아주었던 그 무도황후다. 그녀는 가남풍을 몇 번 꾸짖었는데 가남풍은 그걸 잊지 않고 원한으로 삼았다.
이후 가남풍과 결탁한 사마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사마씨의 연장자 사마량과, 위관(예전 가남풍이 황태자비 경쟁할 때 상대였던 그 위씨의 아버지다) 등이 사마위를 헐뜯자 가남풍은 고명대신 사마량도 누명을 씌워 잔인하게 죽인다.
그런데 자신과 결탁한 사마위도 거슬렸는지 사마량을 죽인 죄로 또 죽여버린다.
이렇게 죽이고 또 죽이고 나니 드디어 모든 권력은 가남풍의 몫이었다.
백치 황제는 일상 생활조차 어려운 지능 장애를 겪고 있었고 황제의 명으로 내려오는 모든 교지는 가남풍이 대신한 것이었다.
가남풍은 장화, 가모, 배위 등 자파의 정치인들을 만들고 안정파 대신들을 기용하여 내치를 안정시킨다. 진나라는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나라, 황권이 약한 편이었는데 가남풍이 2대 황제의 황후로서 권좌에 앉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즉 잔혹하긴 하나 상당한 수완가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권신들과 권신이 될 수 있는 경쟁자들을 싹 숙청한 후 그녀 자신이 직접 10년간 권좌를 누리게 된다.
3. 문란한 성적 사생활
야사 뿐 아니라 정사에 미소년들을 보쌈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는 유일한 여성이다.
백치 황제와는 도저히 만족을 얻을 수 없었는지 가남풍은 다른 남성들을 처소로 끌어들인다.
(용모가 추하니 남편에게 의리를 지킬 거라던 신하들의 주장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였는지)
황제는 독수공방하게 두고 가남풍은 궁중의 무관들과 놀아났는데, 곧 그것도 질려서 길거리로 눈을 돌린다.
권력을 독차지한 가남풍은 길 가는 남자중 얼굴이 반반하고 아름다운 미소년을 보쌈해오게 시켰고, 보쌈당한 미소년들과 침소에서 실컷 육체관계를 즐긴 뒤 볼일이 끝나면 그들을 목졸라 죽였다. 살해당한 어린 미소년의 시신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과격한 취향에 자파 대신들도 골머리를 앓았으며 이렇게 달래고 저렇게 달래었으나 가남풍 입장에서는 자신이 황제와도 같은 권세를 누리는 중이었으니 남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4. 최후
권불십년이라고. 가남풍은 결국 최악의 수를 두는데, 바로 황태자 사마휼을 죽이는 것이다.
선황 사마염이 죽기 전에 백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운 것은, 아들은 백치여도 손자는 똑똑했기 때문이다. 즉 백치 사마충이 잠깐 집권하며 어린 사마휼을 키워내면 3대째에 이르러서는 다시 괜찮은 황제가 들어설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치 황제를 보호해줄 고명대신 사마량을 준비시키고, 황후로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보다 인내심이 있을 것 같은 추녀 가남풍을 골랐다. 그 다음 그들이 백치황제를 지키며 다음다음대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다른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 사마씨끼리 내분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보단 순서를 지키는 게 옳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가남풍의 돌출로 박살났다.
가남풍은 사마씨들을 숙청하고 황제의 뜻을 마음대로 조작하며 자신이 직접 그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그렇게 통치하는 데서만 만족했다면 족했을 가남풍은 기대받던 황태자 사마휼을 죽인다. 가남풍은 황제가 하사한 술에 만취한 사마휼에게 반역의 글을 베껴쓰게 하는데, 그 글을 역모와 패륜의 증거라며 황제에게 바쳐 아들을 쫓아내게 만든다. 그 다음 신료들이 계속 사마휼을 다시 불러올 것을 호소하자 분노하여 그를 독살하고 만다.
가남풍 본인에게 다른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정말로 그냥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 황실의 미래를 죽여 없앤 것이다.
이일로 가남풍은 군대를 이끌고 온 사마륜과 사마경 등에게 붙잡혀 감금당한다. 그리고 사마륜에게 자신이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짜 조서를 받아 독주를 마시고 자결당하니 이때 44세다. 이렇게 가남풍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고, 이것이 그 유명한 팔왕의 난의 시작이다.
5. 그 외
희한하게 가남풍은 중국보다도 일본에서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인데, 직접 권세를 잡고 미소년들을 보쌈한 악녀였다는 점이 묘하게 먹히는 모양이다.
또 가남풍의 네 딸들은 하나같이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지능을 이어받은 건지, 아님 아예 다른 유전자를 받은 건지는 몰라도, 가남풍의 딸들은 다 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뛰어나 시문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중 둘째공주는 전략에 능하였고 셋째공주는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자연석 위에 놓인 한옥 기둥의 비밀 "덤벙주초"와 "그랭이질" (0) | 2020.09.16 |
---|---|
간통죄의 역사 (0) | 2020.09.16 |
서로의 글을 싫어한 역사 속 유명 작가들 (0) | 2020.07.12 |
함무라비 법전 282조 전문 (0) | 2020.06.22 |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0) | 2020.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