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사람들
동민 (중학생)
어머니 (동민의 어머니)
아버지 (동민의 아버지)
재복 (동민의 누나)
덕수, 기철, 명식, 정호, 소정 (동민의 같은 반 친구)
지연 (동민이 짝사랑하는 같은 반 친구)
김 선생님 (체육 선생님)
강사 (체육관 강사)
간호사
S# 1 학교 강당
신체 검사 날이다. 여기저기서 신체 검사하는 모습이 죽 보인다. 키를 재는 아이, 몸무게를 재는 아이,⋯⋯. 담임 선생님이 저울 눈금을 읽으면 부반장인 지연은 옆에서 기록을 한다. 저울 앞에 줄 서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은 울상이 되어 동동거리고 있다. 뚱뚱한 수진, 바들바들 떨며 저울 위에 한쪽 발만 살짝 올려놓는다.
담임 선생님이 수진에게 똑바로 서라고 말하자, 수진은 마지못해 바로 올라서며 조마조마해한다. 담임 선생님, 눈금을 보며 “25!” 하고 외치자, 아이들 모두 놀라는데, 다시 담임 선생님이 “곱하기 2”를 덧붙인다. 수진, 창피해하며 들어가고, 아이들 웃는다.
동민, 키 재는 줄에 서서 그 쪽을 보며 히죽 웃다가, 자기 차례가 되자 발판 위에 올라 발꿈치를 살짝 들고 선다. 체육 선생님, 기다란 수평자를 동민의 머리 위로 꽝 떨어뜨린다. 동민, 아파서 얼굴을 찌푸리며 발꿈치를 내린다. 체육 선생님, 자를 다시 내려 눈금을 읽고 반장은 옆에서 기록한다.
내레이션 하느님은 아주 중대한 실수를 하셨다. 인간의 정신적인 성숙과 육체적인 성숙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남학생들 가슴 둘레를 잰다. 동민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내레이션 나는 이미 인생의 쓸쓸함을 이해하는 어른이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완전히 성숙 했는데 미숙한 소년의 체격을 유지하면서 어린애 취급이나 받아야 하다니,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은 없다.
동민, 자기 차례가 되자 숨을 잔뜩 들이마셔 가슴을 부풀린다. 동민, 가슴 둘레를 재고 나자마자 얼른 돌아서며 참았던 숨을 몰아쉰다. 기철, 가슴 둘레를 잰다. 딱 벌어졌다. 키도 커서 담임선생님을 거의 내려다본다. 담임 선생님이 눈금을 읽자 근처 남학생들 “우아-” 하고, 기철, 으쓱해한다. 기철의 가슴을 만져 보는 아이들도 있다. 동민, 그 모습을 부럽게 돌아본다.
내레이션 기철이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애들을 깔보고 너무 잘난 척을 한다. 그건 기철이가 정신적인 미숙아(未熟兒)임을 뜻한다. 중요한 건 가슴 둘레나 주먹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저 애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동민, 강단 앞을 지나 다른 줄로 가려는데 강단 위에서 운동 기구들을 구석으로 옮기던 체육 선생님이 동민을 부른다.
김 선생님 어이! 잠깐 이리 와 봐.
동민, 강단으로 올라간다. 김 선생님, 운동 기구 한쪽을 들며 동민에게 반대쪽을 들라 한다. 동민, 드는데 허리가 휘청한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종종걸음치며 안간힘을 써서 옮기는데, 그 무게에 치여 넘어질 뻔한다. 김 선생님, 내려놓으며,
김 선생님 허우대는 멀쩡한 녀석이 비실거리기는⋯⋯. 저리 가. 저거나 옮겨라.
동민, 비실비실 물러나 간단한 소도구를 옮긴다. 김 선생님, 아래를 둘러보다 기철을 부른다. 기철, 뛰어올라와 무거운 운동 기구를 가뿐히 운반한다. 아이들, 소리 높여 “우아-” 하고 감탄하다가 동민이 내려오자 장난스레 “우-” 하고 야유한다. 지연이가 저 쪽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다. 동민, 수치스럽다.
S# 2 운동장
방과후 동민과 덕수,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전거를 끌고 간다. 기철, 영호 등 남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기철, 웃통 벗고 뛰고 있다. 동민과 덕수, 기철의 몸을 바라보며 간다.
덕수 (못마땅한 듯이) 그렇게 덥지도 않은데 쟤는 왜 툭하면 홀랑 벗고 저러냐? 누가 멋있다 그럴까 봐⋯⋯. 쟤, 있잖아. 맨날 가슴만 쥐어뜯고 때리고 그런대. 그렇게 해서 부은 곳을 계속 쥐어뜯고 때리고 그러면 그 부은 데가 안 빠지고 그대로 살이 되거든. 쟤 가슴 그렇게 해서 부풀린 거란다. 밥 먹다가 수저로 가슴 탁탁 때리는 거 봤어? 그게 소화가 안 돼서 그러는 게 아니고, 가슴 부풀리려고 그러는 거래. 저만큼 덩치 크면 됐지, 아이고, 치사한 놈. 나 같으면 죽어도 그런 짓은 안 하겠다.
둘, 기철을 째려보며 간다. 별수없이 부러워하면서⋯⋯.
S# 3 거리
동민과 덕수,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간다. 영화관 앞을 지나는데 근육질의 영화 배우 포스터가 붙어 있다. 실물 크기의 입간판도 있다. 동민, 자전거를 멈추고 그 앞에 바싹 붙어서서 유심히 들여다본다. 덕수, 함께 들여다보며,
덕수 내 사진이 왜 여기 있지?
동민 완전 역삼각형이다, 응?
덕수 미스터 아메리카 출신이라는 거 아니냐.
동민 힘도 진짜 세겠지?
덕수 당연하지. 온몸이 완전히 다 근육인데. 있지, 근육이 하도 단단해서 주삿바늘도 잘 안 들어가고, 모기한테 물릴 때 힘을 빡 주면 모기 침이 그대로 그냥 꽉 박혀서 모기가 꼼짝달싹 못 한다잖아?
동민 우아⋯⋯.
덕수 (새삼 자기 몸을 훑어보며) 에구, 우린 같은 남자로서 이 꼴이 뭐냐. 으, 비참하다, 진짜.
동민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
S# 4 유도장
덕수, 들어온다. 뒤를 향해 손짓한다. 동민, 머뭇머뭇 따라 들어온다. 유도 선수들 연습 중이다. 둘,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구경한다. 선수들이 퍽퍽 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둘 다 얼굴이 굳는다. 겁에 질려 슬그머니 도망 나온다.
S# 5 체육관
근육을 과시하며 체력 단련하는 남자들. 동민과 덕수, 한쪽에서 구경하고 있다. 침 삼켜 가며 홀린 듯이 보고 있다.
S# 6 체육관 사무실
동민과 덕수, 강사와 마주 앉아 있다.
강사 너희, 운동 꾸준히 할 자신 있어?
동민․덕수 네!
강사 좋았어. 너희들 진짜 똑똑한 놈들이다. 진짜 생각 잘 했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너희 땐 그냥 밥 잘 먹고 잘 뛰어놀고 아무 운동이나 닥치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거 아주 위험한 거야. 너희 땐 신체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가 많고 또 한창 성장할 때라서 운동 까딱 잘못 했다간 다치기 십상이고, 또 키가 안 크는 수도 있고 체형이 잘못 잡히는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이런 데서 전문가와 상담해서 현재 몸 상태를 고려해서 운동을 체계적으로 잘 해야 쫙 빠진 근사한 몸매를 만들 수 있지. 너흰 진짜 잘 왔다. (서류를 주며) 자, 회원 등록해야지? 너희 같은 애들 때문에 이 나라의 장래가 밝은 거야.
동민과 덕수, 신이 나서 쓰기 시작하는데,
강사 그런 의미에서 너희한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특별 대우를 해 주지. 원래 입회비를 오만 원씩 받아야 되는데 너흰⋯⋯ 에라, 무료다 무료. 어디 가서 이런 소리 절대로 하지 마, 알았지? 그리고 석 달 회비도 십오만 원인데 십이만 원씩만 내.
동민과 덕수, 입이 벌어진다.
강사 왜? 이게 결코 비싼 게 아니에요. 석 달에 십이만 원이면 한 달에 사만 원, 한 달에 사만 원이면 한 주에 만 원, 한 주에 만 원이면 하루에 천 원 하고 몇백 원⋯⋯. 비싸니?
덕수 아뇨, 그 정도면 완전 거저죠 뭐. 우아, 진짜 너무 싸다⋯⋯. 그런데요, 으흠⋯⋯ 저는요, 저⋯⋯ 집에 가서 상의해 보고 다시 올게요. 너는?
동민 어. 나, 나도⋯⋯.
동민과 덕수, 꾸벅 절을 하며 후닥닥 나간다.
S# 7 체육관 앞
동민과 덕수, 맥없이 나와 저전거에 올라탄다.
덕수 ⋯⋯동민아, 너 역기 들던 아저씨 근육 봤어?
동민 어⋯⋯. 너, 달리기하던 아저씨 다리 봤어?
덕수 응⋯⋯.
둘, 자전거를 타고 말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동민, 한순간 뭔가 생각해 내고 얼굴이 환해지면서 힘차게 자전거를 탄다.
동민 야, 학교로 가자.
덕수 뭐, 학교는 왜?
동민, 바삐 달려가고 덕수는 따라간다.
S# 8 학교 강당
동민과 덕수, 빈 강당에 들어온다. 동민, 강단에 놓여 있는 운동 기구들을 가리킨다.
동민 쨘!
덕수 오, 예!
덕수, 가방을 던지고 겉옷도 벗어 던지며 달려가고, 동민도 그렇게 하며 달려간다. 경쾌한 음악 깔리기 시작하며 어설프지만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들 몽타주.
S# 9 동민의 방
몽타주 계속. 동민, 거울 앞에서 웃통을 벗고 각종 육체미 자세를 잡는다. 그러고는 팔굽혀펴기를 한다. 줄자로 가슴 둘레를 잰다. 아파하면서도 가슴살을 꼬집고 때리고 한다. 다시 팔굽혀 펴기.
S# 10 공터(밤)
동민, 권투 선수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공터를 뛴다. 줄넘기도 한다. 그러다 힘들어 주저앉는다. 그대로 누워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본다. 몽타주 끝.
S# 11 거실(아침)
어머니, 주방에서 도시락 들고 나오며,
어머니 재복아! 동민아! 학교 안 가?
재복, 졸린 듯 하품을 하며 나온다.
재복 아, 잠 좀 더 자고 싶다. (도시락 받아 넣으며) 달걀 안 덮었죠?
어머니 (못 들은 척) 동민아, 뭐하니?
재복 덮었구나. (한숨) 촌스럽게 만날 뭐예요. 밥 위에다 달걀부침 얹어 다니는 애가 어딨어요? 요즘 세상에.
어머니 달걀이 완전 식품이라는 거 가정 시간에 안 배웠니? 바쁜 아침이지만 어머니는 영양의 균형을 생각한단다. 암탉이 이 달걀을 낳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어머니가 이렇게 예쁘게 달걀을 부치느라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 너, 그래야 키 커.
재복 키 작은 게 내 탓이에요? 어머니 아버지 유전자가 나쁘니까 그렇지.
어머니 재복이 아버지, 들었어요?
아버지, 신문을 보고 있다가 부인을 힐끗 보고 픽 웃더니 다시 신문을 본다.
어머니 고생해서 기껏 예쁘게 잘 낳아 놨더니⋯⋯. 너, 너무 불효막심하다고 생각지 않니? 아버지, 어머니 유전자가 뭐 어때서?
재복 아버지, 어머니 작품을 보세요. 예쁘긴 뭐가 예뻐. 키 조그맣고 공부도 못하고⋯⋯. 뭐하나 건질 거 있어요? 한 마디로 졸작이잖아?
어머니 얼씨구. 지 공부 못 하는 것도 아버지, 어머니 죄야? 그럼 네 오빠는?
재복 오빠야 제일 먼저 나오면서 우수한 유전자를 혼자 다 챙겨 갖고 나왔죠 뭐. 아이고, 또 하나의 불쌍한 졸작품 저기 내려오시네.
동민, 온몸이 아파 끙끙거리며 층계 난간을 붙잡고 어기적어기적 간신히 내려온다. 재복, 보며 깔깔 웃는다.
재복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완전 사망했겠다. 무슨 운동을 저 지경이 되도록 해, 무식하게. 그렇게 기운이 넘쳐나면 내 방 청소나 좀 해 주지. 너 그래 가지고 학교 갈 수 있겠냐? 누나가 업어다 줄까?
어머니 이재복 씨, 그렇게 하하호호 할 때가 아니실 텐데요.
재복 (시계 보고 경악하며) 으악. (뛰어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
재복, 뛰어나가다가 동민의 어깨를 스친다. 동민, 비명을 지른다.
재복 엄살쟁이.
동민 엄살 아냐!
어머니 너 혹시 어디 잘못 삐끗한 거 아니니? 괜찮은 거야?
동민 (전혀 안 괜찮은 표정으로) 네⋯⋯.
동민, 도시락 챙겨 넣고 인사하며 나가는데,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 그렇게 여유 부려도 돼요? 신문은 회사 가서 읽지.
아버지 응, 그럽시다.
S# 12 빈 강당
동민은 살살 운동을 하고 덕수는 벽에 기대 길게 누워 음악을 들으며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다.
동민 (혼자 하는 게 억울해서) 장덕수, 너 진짜 안 할 거야?
덕수 지금 숨쉬기 운동하기도 힘드니까 자꾸 말 시키지 마. 어젠 내가 잠깐 착각했는데⋯⋯. 야, 솔직히 이두 박근 삼두 박근 이런 거 물 건너가지 않았냐? 요즈음 유명한 연예인들 중에 울퉁불퉁하고 야성적인 남자 누구 있어, 안 그래? 고로 이 몸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서 부드럽고 사랑스런 분위기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이거야. 내 얼굴도 여드름이 좀 나서 그렇지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
동민 미스터 코리아가 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체력 단련하는 거잖아. 남자라면 기본적으로 폭력으로부터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된다고 앞장 서서 유도장 데려간 사람이 누군데?
덕수 아, 글씨, 난 인생관이 바뀌었다니까. 내가 나중에 경호원으로 고용해 줄 테니까 빨리 너나 열심히 해. 아이고, 죽겠다아⋯⋯. (끙끙거리며 자세를 바꾼다.)
동민, 못마땅하게 보다가 운동 계속한다. 역기 들다가 으악, 주저앉는다. 덕수, 놀라 달려온다. 동민, 뒹굴며 신음한다.
덕수 야, 너 척추 부러진 거 아니야? 동민아, 죽지 마. 죽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덕수가 가려는데 동민이 일어나 앉는다.
덕수 괜찮아? 척추 안 부러졌구나. 자식, 엄살은⋯⋯.
동민 엄살 아냐. 아유, 죽겠다⋯⋯. (등을 어루만진다.)
덕수, 보다가 자기 옷을 걷어올린다. 파스로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등 들이밀며,
덕수 한 장 떼.
동민 됐어, 더럽게.
덕수 더럽기는. 내가 너보단 목욕 자주 한다. 자, 등 돌려 봐.
덕수, 허리께에 붙은 파스를 직접 떼서 동민의 등에 붙여 준다.
S# 13 거리
동민과 덕수, 자전거 타고 하교하는데, 저 앞에서 새로 연 가게를 들여다보고 섰던 여학생 몇 명이 동민과 덕수 오는 모습을 돌아보고 기겁해서 후닥닥 달아난다. 동민과 덕수, 의아해하며 가 보니 여성용 속옷 진열장. 동민, 민망해서 곁눈질로 보다가 그냥 지나가려는데, 덕수, 열심히 구경한다. 동민, 안 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구경한다.
동민 ⋯⋯야, 가자.
덕수 여자들 중에는 가슴을 크게 해 보이려고 브래지어 속에 양말 같은 거 집어 넣는 사람도 있대.
동민 진짜?
덕수 그럼, 남들이 알게 뭐야, 안 그래?
동민 (끄덕끄덕) ⋯⋯.
덕수는 가고 동민은 마네킹을 좀더 들여다본다.
S# 14 뜰
동민, 자전거 끌고 들어와 받쳐 놓는데 어머니의 블라우스가 땅에 떨어져 있다. 동민, 블라우스를 주워 빨랫줄에 널고 돌아서다 문득 뭔가를 떠올리며 멈춰 선다. 블라우스를 걷어들고 어깨에 붙어 있는 스펀지 패드를 만지작거린다.
S# 15 자전거 보관소
동민, 자전거 타고 나온다. 덕수, 자전거 자물쇠를 잠그고 있다.
동민 덕수야!
덕수 어, 안녕!
동민은 자전거 자물쇠를 잠그고 덕수는 춤추듯 건들거리며 기다린다. 동민, 덕수에게 다가가며,
동민 아, 이제 덥다.
겉옷을 벗으며 가슴을 쫙 편다. 덕수, 동민에게는 눈길도 제대로 안 주고 흥얼흥얼 노래하며 그냥 걸어간다. 동민, 헛기침을 해댄다. 덕수, 힐끗 보고는 눈길을 거둔다. 동민, 공연히 가슴을 퍽퍽 때리며.
동민 왜 이렇게 소화가 안 되지?
덕수 (보더니) 체했냐? 이리 와 봐.
덕수, 동민의 등을 퍽퍽 때린다. 동민, 비명을 지른다.
동민 아아! 야, 그만 해! 아유, 아파.
덕수, 히히 웃고 가다가 문득 동민의 가슴을 돌아본다. 새삼 동민의 체격을 훑어보고,
덕수 너 부었냐? (동민의 뺨을 때리며) 얼굴은 멀쩡한데? 옷을 많이 껴입었구나?
동민 옷을 왜 껴입어. (티셔츠 앞자락을 올려 속옷을 보여 주며) 속옷 하나밖에 안 입었다, 야.
덕수 (갸웃하며) ⋯⋯ 너 알통 나온 거 같다?
동민 그래?
동민, 시치미떼며 자기의 가슴을 내려다보고 쓸어 보는 척한다. 덕수, 동민의 가슴을 만지려 한다. 동민, 피하며,
동민 어, 하지 마, 간지러워.
덕수 (선망의 눈길) 야아⋯⋯. 어떻게 그 사이에 그렇게 나왔지? 나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할걸.
동민 (흐뭇한 표정) ⋯⋯.
명식 떡수야, 똥민아.
동민과 덕수가 돌아보니 뒤에서 명식과 정호가 오고 있다.
덕수 야, 니네 이리 와 봐. 동민이 가슴 나온 거 봐. 확실히 나왔지, 응? 명식이 너보다 훨씬 더 나왔잖아.
동민, 목에 힘을 주고 가슴을 활짝 편다. 셋이 함께 동민의 가슴을 유심히 본다.
명식 어쭈.
정호 야아⋯⋯.
정호, 동민의 가슴에다 손을 뻗는다. 동민, 얼른 피한다.
정호 왜? 잠깐만 좀 만져 보자.
동민 뭘, 그냥 보면 되지. 나 간지럼 많아, 하지 마.
명식 얼마나 나왔나 좀 보자.
명식이 다시 만지려 하고 동민은 자꾸 피한다. 명식이 동민의 옷을 잡고 늘어지자 동민은 결사적으로 거부한다.
명식 짜식,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되게 뻐기네.
정호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보다가) 어, 그런데 좀 이상하다. 약간 짝짝인 거 같은데?
동민, 가슴을 내려다보고 기겁한다.
동민 아냐, 지금 이 쪽으로 힘을 줘서 그래. 아유, 배야. 갑자기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아유⋯⋯, 덕수야, 먼저 가.
동민, 화장실로 뛰어간다.
명식 쟤, 저거 알통이 아니라 그냥 물살 아니냐? 그러니까 못 만지게 하지.
덕수 아냐. 동민이 쟤 요새 운동 되게 열심히 했어.
S# 16 화장실 안
동민, 들어와 문 잠그고 겉옷을 걷어올리자 어깨 패드 하나가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한쪽 가슴에만 스펀지 패드가 옷핀에 고정되어 있다. 동민, 떨어진 패드를 주워 보고 옷핀이 없어진 걸 안다. 동민, 난감해하다가 이름표를 꺼내서 그 뒤에 붙은 옷핀을 이용해 패드를 속옷 가슴에 고정시키느라 애쓴다.
S# 17 주방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고, 동민이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하며 들어와 빈 도시락을 놓고 나간다.
어머니 너 빨래 가지고 올라가라.
동민, 대답하고 나간다.
S# 18 거실
동민, 소파에 개어 놓은 빨래더미에서 자기 것을 골라 든다. 그러는데 다른 빨래 사이에서 브래지어 떨어진다. 동민, 선뜻 집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손끝으로 집어 얼른 제자리에 놓는다. 층계 쪽으로 몇 걸음 가다가 문득 빨래더미를 돌아본다. 동민, 망설이다가 살금살금 다가간다. 슬쩍 주방을 보면 어머니가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인다. 동민, 주방 쪽으로 등을 돌리고 교묘하게 빨래를 가리고 서서 아까의 그 브래지어를 찾는다. 막 집으려는데,
어머니 동민아.
동민 (화들짝 놀라 재빨리 다른 옷가지로 덮으며) 네!
어머니 (내다보며) 식용유 좀 사 올래?
동민 네, 그럴게요. 빨래 먼저 갖다 놓고…….
어머니가 들어가자 동민은 브래지어를 얼른 챙겨서 감추고 후닥닥 계단을 올라간다.
S# 19 동민의 방(밤)
동민,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실과 바늘로 브래지어 가슴 부분에 어깨 패드를 꿰매고 있다. 이윽고 완성한다. 브래지어를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몰라 헤매다 마침내 제대로 착용한다. 그 위에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훨씬 안정된 알통이라 만족스럽다. 그런데 등 쪽 끈 닿은 부분이 간지럽고 거북하다.
S# 20 학교 화장실 안
동민, 브래지어를 잡아내려 위치를 바로잡고 끈 닿은 부위를 벅벅 긁는다.
S# 21 교실
동민이 들어와 교실에 친구들이 몇 명 안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소정, 칠판을 지우고 돌아서다 동민을 보고,
소정 빨리 강당으로 가. 저번 신체 검사 날 엑스선 촬영 안 했잖아. 오늘 하는데 지금이 우리 반 순서래.
동민, 아찔하다. 가슴을 만지며 허둥대다가 일단 뛰어나간다.
S# 22 건물 출입구
덕수, 황급히 뛰어들어오다 건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동민을 만난다.
덕수 야, 뭐해! 빨리 와, 빨리.
동민, 덕수를 본척만척하고 어디론가 뛰어간다.
덕수 야, 어디 가!
동민 화장실.
덕수, 쫓아가 잡아끌고 뛰기 시작하며,
덕수 시간 없어, 참아.
동민 안 돼. 나 화장실 가서 빨리 이거⋯⋯. 아무튼 나 지금 화장실 가야 돼.
덕수 (사정없이 끌고 가며) 체육 선생님한테 혼나고 싶어?
동민 안 돼, 나 화장실!
덕수 시끄러워!
동민, 끌려가며 괴로워한다.
S# 23 강당
학생 몇 명 떠들며 장난치다가 그 벌로 눈 감고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다. 칸막이 안에서 한 학생이 촬영 마치고 나온다. 김 선생님, 수첩을 보며 다음 번호를 부른다. 아무도 대답 않는다.
김 선생님 12번, 12번 없어?
그 때 덕수와 동민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온다. 시선 일제히 집중되고 둘은 그 분위기에 질린다.
김 선생님 너희들 뭐야. 2반이야? 이 녀석들 이거 형편 없구나.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 줄을 아나, 늦게 오는 녀석들이 없나⋯⋯. 이리 와.
둘, 쭈뼛쭈뼛 다가오는데 칸막이 안에서 간호사, 고개 내밀고,
간호사 다음 학생 들여보내 주세요.
김 선생님 12번이 누구야?
덕수 (손들며) 저요⋯⋯.
김 선생님 빨리 들어가.
덕수는 후닥닥 들어가고, 동민은 머뭇머뭇 서 있다.
김 선생님 왜 늦었는지 말해 봐.
동민, 고개를 푹 숙인다. 김 선생님, 무심히 그 모습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 어, 하는 기분으로 다시 동민을 본다. 헐렁한 티셔츠 목선 옆으로 브래지어 어깨끈이 드러나 보인다. 김 선생님, 뭔가 하고 의아해서 보다가 지휘봉 끝으로 끈을 건드려 본다. 동민, 당황한다.
김 선생님 똑바로 서.
김 선생님,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동민의 가슴을 보다가 손을 뻗는다. 동민 얼떨결에 가슴을 감싼다.
김 선생님 손 내려!
학생들의 시선 일제히 쏠린다. 동민, 머뭇머뭇 손 내리는데 김 선생님, 다시 동민의 가슴을 만지려 한다. 동민, 얼른 피한다.
김 선생님 이 녀석이, 똑바로 서. 안 서!
김 선생님, 동민의 웃옷 속에 손을 넣으려 한다. 동민,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다 마침내 붙잡히고 만다.
S# 24 상담실 또는 다른 곳
김 선생님은 앉아 있고, 동민은 등돌리고 서서 브래지어를 천천히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김 선생님, 보더니 깜짝 놀라 사색이 되며 얼어붙는다. 잠시 그러고 있더니 고개 푹 꺾고 있는 동민과 브래지어를 번갈아 보다가 자기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책으로 부채를 부쳐 가며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쓴다. 잠시 후, 동민을 외면한 채 어렵게 더듬더듬 말을 꺼낸다.
김 선생님 흠⋯⋯ 어, 저⋯⋯ 선생님이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난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난 네가 머리도 짧고 남자애같이 생겼길래 아무 생각 없이⋯⋯. 남자애가 옷 속에 이상한 걸 두르고 있기에 이건 또 뭐하는 놈인가 싶어서⋯⋯. 어쨌든 미안하다. 실수로 이렇게 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어⋯⋯ 그냥 없었던 일로 해 줬음 좋겠다. 흠⋯⋯, 정말 미안하게 됐다. 가 봐.
동민, 당황한다.
내레이션 내가 졸지에 여자가 되다니, 이럴 수가⋯⋯. 하지만 야단을 안 맞았잖아? 그냥 가 버릴까?⋯⋯ 아냐, 난 남잔데.
동민 ⋯⋯저⋯⋯ 여자 아닌데요.
김 선생님, 당황해서 보다가 잠깐 생각하고 한층 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조용히 앉으라고 한다. 동민, 앉는다.
김 선생님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부드럽게)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어, 너⋯⋯ 그러니까 저⋯⋯ 너, 혹시 원래 여자였어야 되는 건데 남자로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하니? 여자가 되는 게 네 소원이지?
동민 ⋯⋯.
내레이션 이건 또 무슨 해괴하신 말씀?
김 선생님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거든. 네가 무슨 얘길 해도 선생님은 다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응? 여자가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 많이 들지?
동민 (생각하다가) 아뇨.
김 선생님 괜찮다니까⋯⋯. 너, 그럼 이거 뭐야. 왜 그랬는데?
동민 ⋯⋯알통⋯⋯.
김 선생님 알통? ⋯⋯알통 나와 보이려고?
동민 네.
김 선생님, 책상 위의 브래지어를 본다. 그러고 보니 가슴 부분에 둥글넓적한 스펀지 패드가 달려 있다. 김 선생님, 어이없어 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김 선생님 너 이 녀석, 이따 끝나고 교무실로 와! 나가.
동민,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데,
김 선생님 이거 안 가져가?
동민, 브래지어를 꾸깃꾸깃 주머니에 넣고 나간다. 동민이 문을 열자 엿보던 친구들, 후닥닥 달아나며 히죽 웃는다. 동민, 절망한다.
S# 25 교정
동민, 괴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강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내레이션 지금 이 순간 이후 내게 일어날 끔찍한 일들을 겪고도 내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어디로 획 사라져 버렸음 좋겠다. 갑자기 이변 같은 게 일어나서 지구가 폭발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쥐구멍 없나?
김 선생님 너 이 녀석, 안 들어가고 뭐 해!
동민이 돌아보니 김 선생님이 오고 있다. 동민, 강당으로 들어간다.
S# 26 강당
아이들, 쑥덕거린다. 선생님 대신 아이들을 통솔하고 있던 반장, 조용히 하라고 소리쳐도 여전히 웅성웅성 시끄럽다. 동민이 들어온다. 쑥덕거리던 아이들, 일제히 동민을 본다. 동민, 울고 싶다.
김 선생님이 들어오자 아이들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동민은 고개를 푹 꺾고 자기 자리로 들어 가다가 덕수와 눈이 마주친다. 덕수, 한심하다는 듯 본다. 동민, 눈길을 떨어뜨린다.
반장이 김 선생님에게 몇 번까지 찍었나 보고하고, 김 선생님은 계속 진행한다. 동민, 친구들이 모두 자기를 흉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
내레이션 내 생애에 이렇게 비참하고 힘든 시간은 없었다. 아무래도 전학을 가야 될 것 같다.
S# 27 교정
아이들 강당에서 우르르 나와 본관 쪽으로 간다. 동민, 뒤에 처져서 고개 숙이고 혼자 걷는다. 기철, 웃으며 동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지나간다. 동민, 묵묵히 간다. 덕수,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오는 동민을 노려본다.
덕수 아이고, 장하다 장해. 동민이 너 인간적으로 정말 그럴 수 있는 거냐? 어쩐지 요새 갑자기 알통이 생겨서 이상하다 했지. 짜식, 치사하게⋯⋯.
동민 ⋯⋯.
덕수 너 가슴 부풀리려고 막 아무거나 가지고 두들기고 때리고 그러다 다친 거지? 아이고, 한심한 자식. 애들이 보고 와서 네가 여자 브래지어같이 생긴 희한한 거 하고 다닌다고 떠들어 대기에, 내가 그거 브래지어 맞다고, 이동민이 걔가 사실은 정신이 좀 왔다갔다해서 여자 브래지어를 하고 다닌다고 할까 하다가⋯⋯, 네 인생이 불쌍해서 봐 줬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셔, 알았어?
동민 ⋯⋯왜? 네가 어쨌는데?
덕수 걔들이 브래지어 어쩌고 그러면서 널 모욕하는데 이 형님이 열 안 받겠냐? 그래서 얘들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작작 해라. 운동 무리하게 하다가 다쳐서 약 바르고 붕대 감고 다녔는데, 붕대가 자꾸 흘러내려서 어깨끈 매달아 단 거라고, 내가 봤다고 딱 그랬지.
내레이션 웬 붕대? 오!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고맙습니다. 오, 내 사랑 덕수. 아이고, 요 귀여운 것.
덕수 야,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 뭐야, 응?
동민 뭐가⋯⋯. 네 말대로야. 저기, 그 역기 있잖아. 강당에 있는 거. 저번에도 다칠 뻔했던 거. 거기다 그냥 콱! ⋯⋯야, 그런데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칼같이 아냐? 너 되게 똑똑하다 야.
덕수 얼씨구, 야, 너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 봐. 그거 혹시⋯⋯ 진짜 브래지어 아니냐?
동민 아아니, 내가 미쳤냐? 아냐.
지연 (지나가다 상냥하게) 너 괜찮니? 많이 다친 거 아냐?
동민 ⋯⋯어, 뭐 그냥 괜찮아⋯⋯.
동민, 지연의 호의적인 미소에 어쩔 줄 몰라 몸을 꼰다.
S# 28 운동장
동민, 운동장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내레이션 이제 하나의 위기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무지막지하게 혹독할 것 같다.
동민, 앞장 서서 가는 김 선생님의 뒷모습을 본다. 김 선생님, 마침내 평행봉 앞에 멈춰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동민을 본다. 동민, 겁에 질린다.
김 선생님 가까이 와.
동민, 죽을 각오를 하고 다가간다. 김 선생님, 평행봉을 잡고 간단히 시범을 보인다.
내레이션 얼마나 혼내려고 몸까지 푸시지? 죽었다.
김 선생님 그대로 해 봐.
동민 ?
김 선생님 따라 하라니까.
동민, 원래 운동 신경이 둔해서 잘 하지 못한다.
김 선생님 다시!
동민, 다시 한다. 처음과 비슷하다. 김 선생님, 다시 시킨다. 동민, 아주 조금 나아졌다.
김 선생님 너, 아침에 남들보다 10 분 먼저 와서 매일 평행봉 해. 앞으로 한 달 동안 매일, 이게 벌이다. 알았어?
동민 ⋯⋯네.
김 선생님 가슴 근육 나오게 하는 덴 이게 최고야. 연습하다 가. (간다.)
동민 ⋯⋯.
동민, 감동과 존경의 눈길로 김 선생님의 뒷모습 보다가 평행봉을 잡는다.
S# 29 운동장
이른 아침의 빈 운동장. 동민, 평행봉을 하고 있다. 제법 익숙하다.
내레이션 체육 선생님께선 한 달 동안이라고 하셨지만 어쩐지 난 내가 이 이상한 벌을 두 달이고 석 달이고 자발적으로 계속할 것 같은 행복한 예감이 든다. 내가 저지른 그 유치하고 바보 같은 짓에 비하면 이건 정말 분에 넘치는 행복한 결말이다. 난 왜 이렇게 운이 좋지? 왜 그럴까? 왜 그렇지? 왜?
동민, 평행봉에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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