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은 목화씨를 훔쳐온 것으로 널리 이름난 고려말의 문신이다.
역사상 최초의 산업 스파이로 이름을 날렸으니 사람들도 문익점 하면 "아! 목화씨!"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로로 따지면 문익점의 진짜 공로는 세상에 없던 목화씨를 훔쳐온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재배와 보급에 힘을 쓴 것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요령이 완전히 없는 사람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공짜로 목화 씨앗을 나누는 소박하고 선량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 삶은 이후 문익점의 목숨마저 구하게 된다.
문익점의 출사와 천재 동문 이색
문익점은 집안을 보면 위로 3대까지 대단한 벼슬을 한 사람이 없고 아버지도 실무를 담당한 말단 문관이다. 단 문익점 아버지인 문숙선이 맡은 사록 자리는 친가 외가에 허물이 있거나 재산이 너무 많으면 뽑히지 않는 깨끗한 자리였으니, 대대로 청렴함은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숙선의 벼슬은 사록이었고 당대의 풍속을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내는 자리였다. 고려시대의 사록들은 지방에 머물며 그 고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히 적어 중앙 조정으로 보내는 게 일이었는데, 일이 일이다 보니 부패상을 축소하기도 쉽고 뇌물을 받기도 쉬운 자리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통치하지 않고 다만 기록하여 전달하는 말단 관직임에도 선정 과정에 청렴함을 요구했다.
문익점은 이곡 아래서 이색과 함께 제자로 공부한 다음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와 동일한 김해부사록으로 관리 일을 시작한다. 처음은 한직으로 시작한 것이다.
반면 친구 이색은 진로가 완전히 달랐는데 문익점보다 먼저 진사시에 합격 후 바로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성리학을 처음 배워 연구하였다. 또한 갓 즉위한 공민왕에게 전제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리며 공민왕의 정치적 지지자가 되었고, 다시 원나라로 가 어려운 데다 드문드문 있기로 유명한 원나라 과거 시험에 도전한다. 고려인이라 차별이 있었음에도 이색은 원나라 과거 회시는 장원으로 급제, 전시는 2등으로 합격였으며, 고려에 돌아와 사대부들과 유림의 아버지가 되며 레전드적 행보를 보인다.
이색이 이와 같은 활약을 펼치며, 공민왕대에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개칭되며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이 온 덕에 말직에 있던 문익점 역시 학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성균관의 순유박사가 된다. 당시의 성균관은 유림들의 교류의 장이었으며 수많은 사대부를 길러낸다. 이색은 고려말의 거의 모든 사대부에게 스승님이었는데, 문익점이 이색의 이런 행보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원나라 사신단으로 간 문익점, 덕흥군파에 서는 실수를 하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심해진 후, 가장 불운한 일은 바로 홍건적의 난이었다. 이 난으로 인해 고려 상황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다시 시도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잘 되지 않았고 고려는 오히려 덕흥군을 새 고려 왕으로 옹립하는 극단적인 수를 쓴다. 이 원나라 군사는 요동까지 진군해왔다가 최영에게 패퇴하게 된다.
문익점은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다가 이때 사신단 중 하나가 되어 원나라로 떠나게 된다. 문제는 문익점이 원 체류시에 줄을 완전히 잘못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원나라가 지명한 덕흥군의 편을 든 것이다. 최영한테 곧 격퇴당해버릴 그 덕흥군이었다.
이때 원 조정에 있던 고려 사신들은 덕흥군파와 공민왕파로 반분되었는데, 양측으로 갈라서서는 공민왕파는 모두 고려로 귀국해버리고, 덕흥군파만 원나라에 남았다. 이중 문익점과 함께 갔던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덕흥군파의 움직임을 고려 조정에 알리는 역할을 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외의 나머지 사신단은 다 덕흥군파였다. 문익점은 고려사절요에도 김첨수, 유인우, 강육연, 황순, 안복종, 기숙윤과 함께 분명히 반란군 쪽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덕흥군의 군대가 고려에 진입도 못하고 패배하자 원나라는 고려의 덕흥군파 사신들을 고려로 돌려보낸다. 덕흥군 자체도 고려에 패한 후 장형을 맞고 고려의 요구로 송환 결정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 반역자가 된 이들에게는 비참한 최후가 예정되어 있었다. 실제로 문익점과 이름을 나란히 남긴 이들 중엔 참살당한 사람도 있고 대부분은 이후 기록도 전하지 않는다. 고려에서도 처벌하기 위해 송환을 요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로 송환 받은 죄인 문익점은 파직 처분을 받는다. 다행히도 사형이나 유배 등 추가 처벌은 없었고 단지 고향에 내려가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으니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열전에 따르면 고려로 귀국하며 문익점이 목화 몇 송이의 종자를 붓대에 넣어온 것이 이때라고 한다.
목화 재배
문익점은 고향에 내려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 재배를 시작한다. 첫 재배에선 문익점이 심은 것은 다 죽고 정천익이 심은 씨앗 중 딱 한 그루만 살아남는데 여기서 100개의 씨앗을 엇는다. 그리고 3년간 애쓴 끝에 재배에 완전히 성공하였다. 중국 승려에게 물어 씨를 빼고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목화섬유로 의복을 짜는 법도 개량하였고, 이후엔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 향리 사람들에게 무료로 씨를 주고 함께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목화씨 자체는 삼국시대에도 있었고 면사 면직물은 백제 유적에서도 발견되었으므로 문익점이 한반도에 없던 목화씨를 처음 가져왔다는 것은 허구이다. 스파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가설 중에는 개량종을 도입했다는 것이 있으며, 이전의 재배량은 희소했을 거라는 추측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상황에서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공로는 문익점이 쉽게 재배하기 어려운 해외종 목화씨를 들여와 직접 힘써서 개량 재배한 다음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급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곧바로 손쉽게 재배한 것도 아니고 유입종 개량 단계를 거치며 수많은 실패 끝에 결국 기후와 환경에 맞추어 재배해냈다는 것이다.
화려하게 중앙으로 복귀한 문익점, 바로 그해 정쟁의 희생자가 되다
목화 재배 이후 문익점은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가 되어 화려하게 복귀한다. 정3품 벼슬만 세 개를 붙여주었고, 무장 세력이 정치적으로 굉장한 힘을 얻은 공민왕 말기에 군사 기밀을 회의하는 밀직사에 넣었다는 건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학사로서 제학에도 임명하고 왕에게 교서를 바치는 업무까지 맡겼으니 파격대우 중 파격대우였다. 최영과 이인임이 장악한 공민왕 말기의 고려 조정에서도 문익점의 목화 재배는 상당한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살벌한 시기에 파격적으로 중앙 정계로 들어오게 된 문익점은 복귀한 바로 그 해, 이인임에게 반기를 들고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명나라를 위해 북원의 사신을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후 정도전에 의해 싸움이 격화되며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 탄핵 상소까지 올리게 되고 당연히 진압 역시 혹독했다. 최영이 군사를 동원해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응징하면서 사대부들의 도전은 철저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남겼는데, 참가한 사람들 중 박상충이 옥고로 죽었고, 사대부 세력 염흥방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인해 권문세족 쪽으로 회유되었으며, 정도전도 고통스러운 귀양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려 말 유일한 희망이라 아무도 함부로 못 대했던 정몽주마저 1년 단기지만 유배를 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초반에만 참여했기 때문인지, 다행히 문익점은 좌천 당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문익점은 유배 대신 연도 없는 고을 군수로 쫓겨나게 된다.
재복귀 3개월 만에 조선 개국파에 맞서 탄핵 당하다
우왕 즉위 직후, 조정에서는 목화 재배 이야기를 직접 언급까지 하며 문익점을 다시 조정에 부른다. 그러나 이번에 내린 벼슬은 전의주부. 하는 일은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맡아보는 일이었는데 문서를 주관하는 적당한 관직이었다. 창왕 때는 문익점을 왕 앞에서 강론을 하는 선생으로 썼다. 이렇게 문익점의 인생은 다시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지만, 고려말 격변기를 맞아 정치적으로 또 한번 줄을 잘못 서게 된다.
바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 주장에 반대한 것이다. 문익점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 오래되고 온건한 사대부들과 뜻을 같이 했고, 조선 창업 세력의 상소에 가담하란 제의를 거부하였다. 병을 핑계로 대며 빠져버리니, 이 사건으로 문익점은 조준의 탄핵을 받아 또 한번 관직을 잃게 된다.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을 맡아 잠시 복직하였으나 이미 현타가 너무 컸는지 시정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 하나만을 남기고 석달만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말년
결국 조정 분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초야로 돌아온 문익점은 스스로를 삼우거사(세 가지 걱정으로 사는 사람)라고 부르며 은거하며 살았다. 이 삼우란 첫째, 나라의 국운이 기우는 것, 둘째, 공자의 학문을 제대로 못 전하는 것, 셋째, 내 도리를 제대로 못 펴는 것이었다.
이후 문익점은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고려에 대한 절의로 더욱 관직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며 여생을 보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도 반대한 터라 이성계가 자꾸만 조정에 들라고 권유하는데도 문익점은 두문불출하고 고집을 지켰다. 3품의 벼슬을 내리고 봉록까지 지급했는데도 무응답이었다.
사실 문익점은 학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음에도 관직에 오래 있어본 경험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붙고 성균관 벼슬을 하고 원나라로 가는 과정도 1360년부터 1364년 사이에 다 벌어진 것이니 5년이 채 안 되는 것이다. 또 복귀할때마다 몇 달 안에 파직 또는 탄핵 당하여 물러나게 되니, 관직에 갈 때마다 아무것도 못하고 번번이 쫓겨났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로 다시는 스스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문익점은 이색, 정몽주와 동문이고 이곡의 직제자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문익점의 목화 보급은 성리학 이념과 조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계속 이용당하였다. 초기 조선에서는 문익점의 일화를 전설로 써먹으며 성리학이 이렇게 백성에게 도움이 된다고 내세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 등이 문익점 전설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문익점 에피소드엔 당시 유행하던 설화가 풍부하게 들어가게 된다. 덕흥군의 편을 들었던 내용은 빠지고 원나라 황제와 맞서는 장면 등 판타지적 픽션도 풍부하게 추가 되었지만, 디테일에 있어서 허풍이 너무 많아 후대에는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
전부터 효자로도 유명했던 문익점은 삼우당이란 서재를 만들어 자신의 효자비가 있는 곳 주변에서 은거하였으며 실록에는 1398년 사망으로 기록되었으나 증손의 말에 따르면 70까지 장수하였고 1400년 사망하였다.
산청에는 아직도 사적 108호 목면시배유지가 남아 있으며, 지금도 거기에서는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해마다 옛터에 밭을 일구어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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