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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이전 고려 문하시중, 경복흥의 일생

역사/고려사

by 덱스트 2020. 9. 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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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한 장면

 

경복흥. 출생일 미상. 1380년(우왕6년) 사망. 

 

공민왕 초기, 문신 위주 개혁과 경복흥의 출세

원래 감찰, 장령 등 전형적인 사무직 공무원 스타일 벼슬을 지내다 공민왕 3년에 군부판서가 되면서 출세길이 열렸다. 공민왕 3년은 아직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펴기 전으로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였다. 바로 직전에 폐위된 선왕 충정왕의 독살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공민왕은 여러가지 구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중 첫번째가 정방 혁파 및 무신 권력 누르기였다. 고려는 무신정변을 겪은 나라였고, 전쟁을 겪었고, 호족의 국가이며 고려 말 내내 왜구에 시달리는 중이라, 나라 스타일상 무신의 힘을 누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무신의 힘을 빼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능력 있는 문신 출신의 인사들을 높이 밀어주는 것이다.

 

공민왕은 경복흥, 이인임 등 문관 인사들을 파격 등용하여 성의껏 밀어주며 정치적 후원을 하였는데, 경복흥은 사람이 순하고 모질지 못한 성격이었다. 참고로 경복흥의 아버지인 경사만도 소박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경복흥 아버지 경사만은 명덕태후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공민왕에겐 매부 정도 된다. 이인임처럼 집안이 유력하거나 출신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외가쪽으로 인척 관계가 되고 또 워낙 어질다고 하니 의심 많은 공민왕으로서는 신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나 보다. 이인임이 주목받기 이전까지는 공민왕이 가장 믿고 쓴 사람 중 하나이다.

 

경복흥은 대체로 온건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군부판서, 판추밀원사, 참지문하정사까지 차례로 역임했으니 영전을 많이 한 편인데, 도성수축 등 백성 동원이 필요한 일엔 일일이 반대하였다. 최영이 문신들의 반대 때문에 홧병을 터트린 것도 이 시기다. 경복흥은 안정을 중시하고 백성을 우선하는 사람이었고, 최영은 승리를 우선하는 장수였는데 성향이 맞지 않았다. 경복흥이 논의에 힘을 쓰던 시기는 1354년부터 1359년 정도로 이 5년간은 공민왕의 측근이자 왕실의 협조자로서 정치 최전선에서 활약한다. 왕은 나서서 정방 혁파, 자체 연호 및 관제 사용, 부원배 숙청 등 강력한 개혁을 하고, 경복흥은 온화한 성품으로 협조하며 뒤에서 뒷받침한 것이다. 경복흥은 1359년 기철 일파 숙청에서도 1등 공신이 된다. 

 

홍건적의 난으로 끝나버린 개혁

그리고 같은 1359년에 홍건적의 1차 침입이 일어나며 경복흥은 지는 해가 된다. 이때 경복흥은 서북면원수가 되고, 안우 등 공민왕 측근들이 출전하는데 밀리고 밀려 서경까지 밀린다. 홍건적 4만명의 침략에 손도 못 쓰고 밀리자 공민왕은 수문하시중 이암을 총책임자로 보내지만 순탄히 살아온 문신들은 차마 출격을 못하고, 진만 치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공민왕이 노여워 경복흥을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까지 하지만, 신료들이 "경복흥처럼 장수가 못될 사람을 등용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하며 만류했다. 경복흥의 온화한 성격과 평소 인품 때문에 겨우 가능했던 일인 것으로 보인다. 전쟁 중에 적을 두고도 진격을 못했는데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이다.

 

장수들이 방어를 하지 않으니 홍건적은 서경 주변 현을 아무렇게나 약탈했고, 개경에서는 피난하려고 백성들이 앞다투어 곡식으로 물품을 사들여 물건 값이 폭등하였다. 조정에서는 각 기관의 하급서리들을 징용하여 전투 인원으로 써먹었지만 당연히 오합지졸이었다. 

 

그리고 그해 처음 등장한 것이 이인임이다. 몽골 감찰어사를 하다 모친상을 당해 고려에 방문한 이승경이 공민왕의 부탁으로 자신의 조카 이인임과 함께 군대를 이끌게 되었고(참고로 이승경은 홧병으로 죽는다. 고려 장수들이 너무 한심해서 밥이 안 넘어가서 죽었다...) 제대로 활약을 한다. 음서로 전객시승이나 하던 이인임은 최영, 이성계, 임견미 등과 함께 1등공신에 책봉된다.

 

공민왕은 경복흥의 방어 문제를 덮어주고 오히려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하사한 다음, 평장사, 수문하시중에 올려준다. 그리고 무려 20만명 가까이 몰려온 2차 홍건적 침입 때는 장수로 보내지 않고, 자신의 호위를 맡겨 함께 복주로 도망간다. 그러나 이때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어가가 떠날 때 공주도 연을 못타고, 차비 이씨가 탄 말은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릴 만큼 파리했다고 한다. 공민왕과 경복흥은 현재의 안동으로 피난을 갔는데, 물산이 풍부하여 나름대로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개경은 왕이 떠난지 5일만에 함락되어 홍건군의 잔학한 행동이 눈 뜨고 못 볼 수준이었다고 한다.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기도 하고,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하였다. 총병관이 된 정세운이 개경을 평정할 때까지 개경은 생지옥이었고, 민심은 이루말할 수 없이 추락하게 된다.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경복흥은 왕을 호종한 공으로 다시 한번 홍건적 격퇴의 1등공신이 된다. 사실 경복흥이 격퇴에 관련하여 한 일은 하나도 없으나, 안동으로 왕을 잘 모셨다는 것이다. 공민왕도 깨달은 바가 있는지 이때부터는 경복흥을 다시는 최전선에 보내지 않는데, 군사를 이끄는 역할은 다시 무신들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홍건적 격퇴의 기쁨도 잠시, 총병관 정세운이 살해되는 사건과, 김용의 계략, 흥왕사의 변과 노국공주의 죽음, 거기에 이어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원에서 최유와 모의한 덕흥군의 침입까지, 위태로운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나면서 더는 경복흥으로 대표되는 청렴하고 온건한 대신들은 힘을 쓸 수 없었다. 대신 백전무퇴의 명장 최영 등 공민왕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구해낼 수 있었던 무장 세력이 다시 정계에 부상하게 된다. 홍건적의 침입과 일련의 전쟁들은 공민왕의 초기 개혁에 큰 상처를 남긴다. 그렇게 공민왕의 문신 우대 정책도, 경복흥의 시대도 막을 내린다.

 

허수아비 재상이 되다 

1365년, 공민왕 14년에 경복흥은 수시중이 되었지만 이때는 신돈이 권세를 독점하고 있었다. 경복흥은 재상이 되고도 정사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제 권력의 공은 신돈과 마음이 맞았던 이인임 등 개혁파에게 넘어간다. 민중은 끔찍한 전쟁들을 겪으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고 신돈을 성인으로 칭송하였다. 전민변정도감 설치나 노비안검법 등 권문세족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정책들은 파괴된 양민들의 민간 경제를 되돌리는 방안들이었다.

 

경복흥은 다른 많은 명신들과 마찬가지로 신돈이 권세를 부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신돈과 당당하게 맞섰다 파직된 다른 신하들처럼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였고, 그렇다고 또 신돈과 한 편이 되어 신돈의 개혁을 적극 지지하지도 못하였다. 경복흥은 허수아비 재상으로 지내며 그다지 기껍게 굴지 않았으므로 신돈에게 미움을 샀고, 결국 청원부원군에 봉해지며 파직되었다. 1367년 경복흥은 오인택, 안우경, 김원명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다 들켜 곤장을 맞고 흥주로 귀양을 갔는데, 처자가 노비가 되고 가산을 몰수당한 다른 일파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경복흥은 1371년이 되어 신돈이 제거된 후에야 다시 소환되어 좌시중이 되었다. 그리고 좌시중은 경복흥, 우시중은 이인임인 상태로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두 사람의 의견은 양분된다. 경복흥은 명덕태후와 함께 다른 종친을 세우자고 주장하였고,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지대로 우왕을 즉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덕태후가 왕우가 자신의 손자인지 의심하는 상황에 인척인 경복흥도 태후의 편에서 끝까지 설득하였지만, 이인임을 이기지 못하였다.

 

우왕 즉위 후부터는 모든 것이 이인임의 주장대로 된다. 경복흥은 이듬해 정도전을 귀양 보내는 것에 찬동하였고, 대신 우왕이 서연(書筵)을 게을리 하지 못하게 간하는 것과 인사행정 부패를 막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우왕 즉위에 반대는 해놓고 또 막상 즉위하니 열심히 보필하려 하고 어떻게든 또 좋게 끌고 가려고 애쓴 것이 경복흥의 말년이었다. 그러나 경복흥이 이끌던 온건한 외척 세력은 이인임의 능란한 독재 정치에 완전히 힘을 잃었고, 홧병에 이른 경복흥은 매일 매일 술만 마시며 도당(都堂)에도 나가지 않았다. 

 

1380년 이인임, 임견미는 경복흥이 정무를 보지 않는다고 왕에게 고해바쳤고, 우왕은 경복흥을 청주로 귀양 보낸다. 청주는 경복흥의 본관으로, 고향에 돌려보내 준 것은 그간 고려의 재상으로 살아온 경복흥에 대한 나름대로의 존중의 의미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 일선에서의 완전한 실각을 뜻하였고 귀양한 그해 경복흥은 세상을 떠난다.

 

청렴하고 온화한 인생을 살아온 경복흥은 경보, 경진, 경의 삼형제를 두었고 후손들 역시 효자비가 설만큼의 극진한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 행실이 바르고 절개가 굳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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