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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노(官奴)에서 종 3품 대호군(大護軍)이 된 장영실

역사/기타

by 덱스트 2022. 8. 31.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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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의 출생일 및 성장과정은 솔직히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조선의 신분 계층 중 가장 천한 노비(奴卑)였기 때문이다.

1434년(세종 16) 7월 1일자의 세종실록을 보면 장영실은 부산 동래현 관노(官奴)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433년(세종 15) 9월 16일자의 기록에는 그의 부모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행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동래기생(東萊技生)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이에 의하면 장영실은 원나라 출신의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영실의 본관인 아산 장씨 세보(牙山蔣氏細譜)에 의하면 이와는 조금 다르다.

아산 장씨(牙山蔣氏)의 "시조인 장서(蔣壻)는 중국 송(宋)나라 때 신경우위 대장군으로 출신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진의 금(金)나라의 세력을 넓혀 중원으로 들어와 송나라는 국도인 개봉(開封)을 버리고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를 하였다.

그는  '선대에게 물려받은 영토를 한치라도 남에게 주어서는 안된다.'며 금나라와 타협은 불가하고 맞서 싸울 것을 주장(강경파 - 장군 악비(岳飛))하였지만, 송나라 조정내 온건파(금나라와 화평 - 진회(秦檜))에 의해 뜻이 좌절되어, 고려 예종(16대 왕) 때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와 지금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도착하여 고려국으로 망명을 요청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예종은 장서(蔣壻)를 아산군(牙山君)에 봉했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아산(牙山)으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씨 중 장(蔣)씨는 모두 아산 장씨로서 장영실(蔣英實)은 아산 장씨의 족보에 장서(蔣壻)의 9세손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장영실(蔣英實)의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이 아니라 고려 예종 때 부터 때 이미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이었다.

아산 장씨 족보에 의하면 장영실(蔣英實)의 부친인 장성휘(蔣成暉)는 전서(典書)라는 벼슬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전서(典書 = 정 3품)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정3품 관직으로서, 중앙 관청의 장관급 직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영실(蔣英實)의 부친 장성휘(蔣成暉)는 5형제 중 셋째였는데, 나머지 네 형제도 모두 전서(典書) 벼슬을 지냈다. 때문의 그들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典書)의 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아산 장씨의 3세손인 장공수(蔣公秀)와 장숭(蔣崇)은 고려 조정에서 무기의 제조를 맡았던 군기시의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장영실(蔣英實)의 고조할아버지인 5세손 장득분(將得芬)은 군기시의 책임자 및 천문지리학을 담당했던 서운관(書雲觀)의 책임자를 지냈다.

즉, 장영실(蔣英實)의 가문은 대대로 과학기술 분야의 책임자로서 고위직을 지냈던 쟁쟁한 가문이었던 것이다. 시조 장서(蔣壻)의 고향인 중국 항주가 아라비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지역으로서, 군사 및 무기 등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장영실(蔣英實)이 부산 동래현의 관노로 있었던 것도 부친이 동래현에 파견된 고위직 군사기술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동래는 고려 말 무렵 왜구들의 침략이 잦았던 국방 요지였다. 따라서 동래에 파견되어 있던 부친 장성휘(蔣成暉)가 그 지역의 기생과 인연을 맺어 장영실(蔣英實)을 낳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 시대는 태종 때 엄격한 신분제도가 만들어져 기생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천인 계급에 속해야 했기 때문에 장영실(蔣英實)도 동래현의 관노가 된 것이다.

그럼 장영실(蔣英實)은 이런 천한 계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중국어 및 아랍어에 능통할 만큼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먼저 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1383년설과 1390년설 등 두 가지 설이 있다.

1383년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무렵인 1392년에 장영실(蔣英實)은 만 9세가 된다. 따라서 비록 관노의 신분이지만 장영실(蔣英實)은 9살까지는 높은 벼슬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고 본다.

그러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의 고위직 관리였던 장성휘(蔣成暉)의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장영실(蔣英實)과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추정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 부친 장성휘(蔣成暉)의 생몰년도 및 묘소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장성휘(蔣成暉)의 다른 네 형제의 묘소는 각각 경북 비안, 의성, 안동, 의흥 등지에 흩어져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이 개국되자 다른 네 형제는 다른 지방으로 피해 화를 면했으나 장성휘(蔣成暉)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을 거라는 주장이다.

1390년 출생설을 주장하는 이의 논거는 알려진 대로 동래에서 전서 벼슬을 지낸 장성휘(蔣成暉)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장영실이 어린 시절에 부유한 환경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본다.

그러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대에 이르러 신분제의 실시로 장영실은 관기인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졸지에 동래현 관노로 예속되었다는 것.

어쨌든 장영실은 어린 시절부터 당시 상류계층 자제들의 예에 따라 중국어 및 아랍어 등의 학문적 교양을 이미 갖추었고, 조상대부터 내려오는 과학적 소양을 이어받아 동래현 관노로 있으면서도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다 세종 때 각 지방의 능력 있는 인재들을 임금에게 천거하는 도천법(道薦法)이 시행되면서 장영실은 관찰사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태종 때였으니 장영실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혼란한 시대적 환경에 따라 신분이 오르내리는 인생의 굴곡을 일찍이 경험한 셈이다. 한양으로 올라온 장영실은 세종이 즉위하면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야사 총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정조 때 이긍익)에 의하면 1421년(세종 3)에 세종이 윤사웅(尹士雄), 최천구 (崔天衢)등과 함께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내 각종 천문학과 천문기계를 익혀 돌아라고 특별히 명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 일행은 1년간 중국에서 머무르다 조선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장영실은 원나라의 수리 천문학의 천재인 곽수경
(郭守敬)이 만든 간의인 혼천의에 대해 공부를 심도 깊게 하였다. 이는 장영실이 조선에 돌아와 조선의 혼천의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 곽수경(郭守敬)의더 많은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96


귀국한 다음해인 1423년 장영실은 상의원 별좌 (尙衣院 別坐 : 문관)에 임명되면서 관노 신분에서 벗어났다. 이때 세종이 장영실을 별좌에 앉히려 하자,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둘 수 없다며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반대하고 나섰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일용품 및 금은보화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지만 월급은 받지 못하는 무록관이었다.특히 문반직으로 벼슬이 제수되자 많은 양반들이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및 유정현(柳廷顯) 등이 장영실은 상의원에 적합하다고 주장하여 세종은 그를 별좌로 임명했다. 관노가 일시에 종 5품직에 오른 것은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별좌가 된 지 1년 만에 다시 장영실은 정 5품 사직(司直)의 벼슬에 올랐다.(문반(文班)들의 계속된 반대로 인해 세종은 이때 부터 장영실에게 무반(武班) 벼슬로만 벼슬을 제수하게 된다.)

사직(司直)이란 벼슬은 실무는 없지만 월급을 받는 녹관으로서, 군부에 속한 직책이었다. 그 후에도 장영실은 승승장구해 1433년(세종 15)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에 오르고, 1438년(세종 20)에는 종3품인 대호군(大護軍: 현재 중앙직 공무원 국장급)에 올랐다.

그동안 장영실이 이룩한 업적은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축조했으며 혼천의, 대간의, 소간의, 규표,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등의 과학기기를 제작했다.

또 한국 활자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갑인자'를 이천
(李蕆) 등 당대 유명한 과학기술자들이 만들어 인쇄능률을 향상시켰으며,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발명하는 데 참여했다. 특히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하고, 혼천의와 자격루의 기능을 결합시킨 옥루를 만들어 흠경각에 설치한 업적은 장영실로 하여금 호군과 대호군의 직위를 받게 했다.

 

*. 이천(李蕆)의 더 많은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98

 

또한 경상도 채방별감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방의 광물을 조사했으며, 박연과 함께 성률과 악기를 고치고 바로잡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벽동군에서 청옥이 난다는 소식이 들리면 세종은 장영실을 보내 채굴하게 했고, 특별한 제련 기술을 갖고 있는 중국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장영실로 하여금 그 기술을 배우게 했다는 내용 등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의 최고의 작품은 1438년에 세종에게 바친 옥루(玉漏)였다. 옥루는 당시 최첨단 자동(물)으로 작동하는 천문 시계였다. 이것을 본 세종은 너무 기뻐 왕이 경복궁(景福宮) 안에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 바로 옆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옥루(玉漏)를 설치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흠경각(欽敬閣)에 들러 옥루(玉漏)를 들러다고 한다.  

 

흠경각(欽敬閣) 이름은 세종이 지은 것으로,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 나오는 전설에서 요임금이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준다. (흠약호천 경수인시: 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문구에서 유래한다.

 

 

흠경각 안에 장치된 천문시계는 물의 흐름으로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시간과 천상(天象)이 표시되도록 만든 교묘한 것이었다. 7자(2.1m) 되는 종이로 발라 산(山)을 만들고, 그 둘레에 금으로 만든 해가 돌게 하였으며, 옥녀(玉女) 넷과 방위신 넷이 시각에 정확히 맞게 움직이고, 다른 인형이 때에 맞추어 종이나 북 또는 징을 치게 되어 있었다.

 

심지어 세종은 매일 강무(講武: 조선시대 왕의 친림 하에 실시하는 군사 훈련으로서의 수렵대회.)할 때 장영실을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해 명령을 전달시키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1442년 장영실은 아주 이상한 사건에 휘말린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안여(安輿)란 임금이 타는 가마를 말하는데, 장영실이 감독하여 만든 가마가 부서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임금이 다쳤다는 등의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가마는 아마 시험으로 타보던 중에 부서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세종의 조치는 의외로 단호했다. 조사를 마친 의금부에서는 형률에 의거해 장영실에게 곤장 100대를 쳐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장영실의 죄를 2등 감형시킨 후 곤장을 집행하고 불경죄로 직첩을 회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후로 장영실은 세종실록에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은 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실 장영실이 실수를 저질러 처벌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425년 남원부사로 부임하던 이간이 관용물자를 빼돌려 여러 사람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발생했는데, 장영실도 뇌물 수수자로서 벌을 받은 적이 있다.

또 1430년에는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을 따라 북경에 다녀오다 요동 조선관에서 머무르던 중 사신 일행이 관아의 말을 타고 사냥을 했다가 발각된 적이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의금부에서는 주범 이징에게는 형장 100대, 종범인 장영실 등에게는 형장 90대를 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2등을 감해 직첩을 거두지 말게 하고, 특별히 장영실과 다른 한 명만 벌금형으로 처리하는 관용을 보였다. 그런데 안여(安輿) 파손 사건의 경우 단 한 번의 실수로 장영실은 관복을 벗어야 했고, 또한 그 후로도 세종은 다시 장영실을 찾지 않았다.

세종은 그처럼 아끼던 장영실을 왜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에 영원히 내팽개쳐 버렸던 것일까?

장영실을 파문한 세종은 그해 말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간의대(簡儀臺)를 헐어버리고 거기에다 자신의 퇴위 후 거처할 이궁을 짓게 한 것이다.

간의대는 1434년(세종 16)에 건립한 왕립 천문대로서, 각종 천문관측 기기들을 설치한 조선 최초의 천문 관측대였다. 돌로 만들어져 높이 31척(약 9.4m), 길이 47척(약 14.24m), 넓이 32척(약 9.7m) 규모였다.

 

매년 음력 12월 31일(동지사)에 중국의 황제는 그 주변국의 왕이나 사신들을 모아 하늘에 제를 지내면서 중국(어떤 왕조라도 똑같이)의 황제가 하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Event를 했다. 그리고 주변국의 왕이나 사신들의 자기의 나라로 돌아갈 때 그들의 손에는 중국의 달력을 주었고, 그 주변국들은 그 달력으로 중국과 똑같이 시간을 보냈다.

 

***.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건원(建元)"이라는 연호(年號: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자기의 치세연차(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를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한 무제는 6년 혹은 4년마다 연호를 고쳤는데, 이후 이 기간은 무시되어 군주 일대에 몇 개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 때는 1대에 한 연호〔一世一元〕를 사용하였다. ***

 

당시 조선은 매년 초겨울에 동지사를 중국으로 보내 명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달력 110부를 받아서 사용했다. 달력은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시기를 알려주는 데 사용되므로, 농업 사회에서 매우 귀중했다. 그런데 조선은 왜 명나라에서 굳이 달력을 받아서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명나라가 주변국들에게 역법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중국의 황제가 직접 천명(天命 = 天子)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므로, 중국 외의 주변국은 모두 황제가 하사하는 역법을 사용해야 된다는 논리였다.

이는 명나라의 풍속 및 법률을 정리해 놓은 ‘야획편(野獲編)’에도 적혀 있는데, 명나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천문학 공부를 할 수 없으며 달력을 만들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명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도 천문과 역법의 독립을 가장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과 조선은 지리적 조건이 다르므로 명나라의 역법과 천문학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동지사가 중국에서 달력을 받아 돌아오면 정초가 훨씬 지나 있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따라서 세종은 한양을 기준으로 새로운 달력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 기초 작업으로 진행된 것이 바로 천문을 직접 관측하는 간의대 사업이었다. 이처럼 당시 국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간의대를 건립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헐어버리겠다는 세종의 명이 내려지자 상소가 빗발쳤다.

안팎의 궁궐이 다 준비되어 있어서 거처할 곳이 많은데 왜 굳이 간의대를 허물려 하는지 모르겠으니 이궁을 짓는 일을 중지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또 사헌부에서도 간의대는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힘쓰는 처소인데 경홀하게 헐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세종은 간의대를 헐어버린 후 경복궁의 가장 구석진 북쪽 끝으로 옮겨지었다. 세종이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숙원 사업의 일환인 간의대를 헐어버린 이유는 세종실록에도 나와 있다.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하였다.” (세종실록 1443년 1월 14일)

세종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처음 간의대가 자리했던 곳은 경회루 바로 뒤였는데, 경회루는 명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면 잔치를 베푸는 곳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사신들이 간의대를 볼 수밖에 없었고, 독자적으로 천문을 관측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심각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었던 것.

이런 분위기는 간의대가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진 중종대에서도 감지된다. 1537년(중종 32) 중국 사신에게 준 지도에 간의대도 기록되어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중국 사신이 와서는 중종에게 직접 간의대에 대해 물어본 것.

그때 중종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며, 간의대 주위에 울타리를 높이 쳐서 안 보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대체로 제후국의 제도가 아니므로 숨기려는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을 달아놓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세종이 장영실을 내친 것은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로부터 그를 보호하려는 속셈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이런 시각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장영실과 함께 안여 제작의 책임을 졌던 조순생(趙順生)에 대해서는 세종이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록에 의하면 조순생(趙順生)은 안여
(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가 견고하지 않은 것을 보고도 장영실에게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럼에도 세종은 조순생(趙順生)을 처벌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으며, 이에 대해 신하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항의했음에도 세종은 끝까지 분명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추리는 장영실에 대한 조선의 역법과 천문은 완성이 되었다는 세종의 판단과 1443년(세종 25년)에 반포된 우리글인 한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본다.

 

천문과 글자는 사대사상(작은나라는 큰나라를 따라야 한다.)으로 인해 명나라 황제가 매년 내려준 것으로 천문과 달력을 삼았고, 글도 중국의 글인 한문을 사용하였으나 세종은 장영실과 이순지로 하여금 독자적인 천문과 시간, 역법(달력)을 완성시켰고, 나머지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 우리글은 한글을 반포하기 위한 수순이 아닌가? 한다.

 

무엇 하나도 명나라의 눈치를 본다고 마음대로 할수 없었든 조선의 왕들은 세종에 이르러 천문과 역법과 시간 과 글 등을 독립한 것이다. 이에 한글반포 전에 명나라 천문을 간측하는 간의대를 옮겨 명나라 사신들이 잘 보지 않은 곳에 다시 짓고, 이를 만든 장영실을 명나라에게서 보호하고자 작은 실수를 구실 삼아 장영실에게 크게 나무라고 조선에 모든 기록에서 장영실이란 이름을 사라지게 한게 아닌가 한다. 장영실의 가마 사건이 후 일년뒤에 세종은 한글 반포(1443년 음력 9월)를 한다. 

 

관노가 대호군이라는 종3품 벼슬까지 올랐고, 더구나 문신 중심사회에서 기술자가 수많은 업적을 내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니 장영실에게 쏟아졌을 보이지 않은 질시와 비난은 엄청났을 것이다. 따라서 안여 사건 하나로 장영실이 그처럼 큰 처벌을 받은 것은 그동안 누적된 질시 세력들의 이 같은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장영실이 사라진 후의 어느 역사 기록에서도 그에 대해 나쁜 평판이 실린 적이 없다. 때문에 장영실의 갑작스런 퇴장은 불경죄라는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조선 사회는 관료들이 임무를 수행하다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매우 엄격히 문책했으므로 장영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또한 장영실이 다시 복귀하지 못한 것은 세종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에서 더 이상 그가 기여할 부분이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로는 장영실이 문책을 당한 후 조용히 살다가 갑자기 죽었으므로 세종이 다시 부를 기회가 없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1383년생이 맞다면 문책 당시 장영실은 이미 예순 살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갑작스런 퇴장을 감안하더라도 장영실의 이후 활동이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퇴장 후 장영실의 생에 대해서는 본관인 아산에서 살았다는 설과 부친의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여생을 마쳤을 거라는 설 등이 분분하다.

한편, 세종이 명나라 사신의 눈에 띄지 않게 경복궁 북쪽 구석으로 옮긴 간의대는 결국 1915년경 일본 총독부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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