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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일곱 옹주들 (화순, 화평, 화협, 화완, 화유, 화령, 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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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스트 2021. 1. 1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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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영조의 자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사도세자입니다.

 

 

아들을 죽인 아버지이자 출신, 경종 독살에 대한 끊임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린 영조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정신적으로 학대 받고 스스로도 수 없는 사람을 죽인 사도세자...

 

이 전대미문의 사태 속에서

조선에서 누구와 견주어도 부럽지 않은 지위여야 할 왕의 딸들도

썩 순탄하지는 못한 평생을 보냈습니다. 

 

영조에게는 딸이 총 12명 있었는데

이 중 조졸하지 않은 7명의 옹주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1. 화순옹주

 

화순옹주는 영조의 차녀인데,

장녀 화억옹주가 영조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조의 장녀나 다름 없었습니다.

 

옹주의 어머니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맞아들인 첩인 정빈 이씨인데

영조가 세제이던 시절에 갑작스럽게 죽고 맙니다.

정빈의 아들이자 영조의 장남이던 효장세자, 즉 화순옹주의 오라비도 단명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친 동기간이 모두 일찍 죽은 것만으로도 불행인데

심지어 정빈과 효장세자의 죽음은 독살의혹이 공공연할 정도로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영조와 사이가 지극히 나빴던 선의왕후-경종의 계비-가 저지른 일이라는 야사가 있습니다)

심지어 화순옹주도 어린 시절 독살 미수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조도 혼자 남은 화순옹주를 안타까워 하며 마음을 썼는데요.

 

다행히 무사히 성장한 화순옹주는 김한신과 혼인하는데, 둘 사이는 몹시 각별했습니다.

하지만 부마가 젊은 나이에 죽자 화순옹주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세상을 따라 등지고 맙니다.

 

이 때 화순옹주에게는 과부인 다른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영조는 혹시라도 다른 딸들도 그 길을 따라갈까봐 이 일을 비판하고,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은 동안에도 계속해서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채근했다고 합니다.

 

정조 대에 가서는 열녀문이 내려졌습니다.

 

 

 

이건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중인 화순옹주의 유품 혼례복입니다.

색깔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는데 무늬도 참 곱죠

 

 

 

2. 화평옹주

 

 

영조의 셋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본 첫 딸입니다.

영조는 자식들을 편애하기로 유명했는데 그 편애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아마 이 화평옹주일 것입니다.

옹주는 성품이 온순하고 동생들을 많이 위해서 자신이 받는 편애를 통해

아버지와 사이 나쁜 세자의 사이를 많이 중재하려고 노력했는데요.

 

실제로 한중록에서 혜경궁이 아마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더라면

세자와 영조가 이렇게 까지 극단적으로 가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스물 둘의 나이에 아이를 낳다 죽고 마는데,

이 때 영조는 밤마다 빈소에서 통곡을 하고,

염하는 데도 자리를 지키는 등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3. 화협옹주

 

화협옹주 또한 영빈 이씨의 딸인데,

언니인 화평이 아버지의 편애를 지극히 받은 딸이었던 반면

화협옹주는 사도세자와 마찬가지로 몹시도 미움 받았던 딸이라고 합니다.

 

세자에게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쁜 말을 들으면 꼭 화협을 불러 한 마디 던져 액을 씻었다고...

그 때문인지 세자와 화협옹주는 서로 슬픔을 나누며 우애가 좋았습니다.

 

화협옹주는 스무살에 홍역에 걸려 사망합니다.

 

참고로 저 사진은 옛날 사극 <대왕의 길>에서 화협공주 역을 맡은 배우 분인데,

당시 궁중에서 쓴 족두리가 훌륭하게 고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화협옹주의 무덤과 조의문,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는데

그걸 보면 영조가 화협옹주의 죽음을 굉장히 애통해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화협옹주의 무덤은 남양주에 있는데 윗사진은 거기서 출토 된 부장품들입니다.

화장품과 거울들이고 이걸 복원해서 프린세스 화협이라는

화장품 라인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4. 화완옹주

 

네번째는 바로 화완옹주

아마 정조나 사도세자를 다룬 사극에서 화완옹주는 빼먹지 않고

같이 다루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영조의 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편애 받는 딸이었고,

특히 화평이 죽은 후에는 그 사랑까지 모두 화완에게 쏟아졌습니다.

 

언니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화완옹주도 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중재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다만 사도세자는 편애 받는 여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른 누이들에 비해 화완에게 냉담했습니다.

 

옹주는 정치달과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딸을 하나 얻는데 그만 딸이 생후 5개월만에 죽고 맙니다.

딸이 죽은지 1년이 되지 않아 남편까지 사망하고,

이에 영조는 시집 가 바깥에 나가 살던 화완옹주를 도로 궁에 들여 곁에 두고 아꼈다고 합니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 사후 화완옹주는 세손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쏟는 편입니다.

세손이 세손빈(효의왕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 해서 이간질 하기도 했다고 하고

(실제로 정조와 효의왕후는 썩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세손이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까지 죄다 관여하여

영빈이 지나치다고 지적했을 정도...

 

이후 세손(정조)이 커가면서 고모와 점점 멀어진 것 같고

이후에는 사극에서도 다루어진 것처럼 양아들과 함께 유배살이를 하게 돼

이후 기록에서는 끝까지 옹주 자리를 회복하지 못하고 정처(정씨의 처)라고만 불립니다.

 

 

5. 화유옹주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공주들이지만

개중 화유옹주는 다른 자매들에 비하면 순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로(영조가 마흔 일곱에 얻은 딸) 어여쁨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호조판서의 아들이던 황인점과 결혼하는데,

이 때 영조가 하사하여 부부가 함께 살게 한 집이 옛 진명여고 자리라고하네요.

(지금 진명여고는 목동에 있는데 이전에는 종로구에 있었다고 함. 화유옹주 사후 도로 왕실소속 건물이 되었다가

대한제국시기에 순헌황귀비가 여기에 진명여고를 세운 것)

 

이건 모두 화유옹주 무덤에서 출토 된 유물들인데 다 너무 아름답죠?

 

 

 

6. 화령옹주

 

 

화령옹주도 영조가 늦게 얻은 딸인데,

정조 대에 사도세자를 무고했다고 해서 사약을 받고 죽은 숙의 문씨의 첫 딸입니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을 때 화령옹주에게도 벌을 내려야 한다고 신하들이 주청했지만

정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의 고모지만 정조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리네요.

 

 

7. 화길옹주

 

 

화길옹주는 마찬가지로 문숙의의 딸이고 영조의 막내딸입니다.

화길옹주 또한 열아홉 어린 나이에 죽어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마는데

당시 장례를 몹시 화려하게 치러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옹주가 혼례 후 살았던 집이 지금의 남양주에 있는데(궁집)

현재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창살이나 별채의 형태가 참고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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