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타

사찰 노비에서 정1품 후궁이 된 신빈김씨(愼嬪金氏)

덱스트 2022. 8. 31. 01:53



조선이 건국하고 얼마되지 안었을 때..왕권을 놓고 왕과 그의 아들들이 죽고 죽이는 두번에 난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번의 난의 진정환 의미는 "절대 왕권(王權)이냐, 아니면 현명한 신하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신권(臣權)이냐"를 두고 피(무력)으로써 절대 왕권을 쟁취한 이방원(태종)의 승리였다.

 

고려가 망할 때도 무력이 아닌 양위(왕씨 나라를 이씨의 나라로)로 자연스럽게 나라를 이어 받은 것과는 달리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왕족도 집권세력도 하나의 공감대를 가진 것이 있었다. 바로 계급사회라는 것이다.

 

사회에 따라 조금씩은 변해가겠지만 조선의 계급사회는 확실히 선(線 = 법)을 긋었다. 절대 그 선에서 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몇명은 그 선을 넘어섰으나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조선 초 사회에 기틀을 잡고자 모든게 엄격한 잣대를 들고 법에 맞추고자 할 때 이 선을 넘어선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도 해피엔딩으로 말이다... 오늘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종 이도(世宗 李祹)는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과 어머니 민씨(閔氏)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권 쟁탈로 두번에 형제끼리 피비린내 나는 승자는 이도(李祹)의 아버지인 이방원(李芳遠)이 조선3대 왕이 되고, 이방원(李芳遠)의 셋째 아들인 이도(李祹)는 태종 등극 8년이 지난뒤인 1408년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그리고 4년 뒤에 태종 12년인 1412년에 둘째 형 효령군 이보(孝寧君 李補)와 함께 대군(大君)으로 진봉되었다.

1418년 첫째 형 이제(李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섭정)을 하여, 모든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다.   
태종은 웡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종이 대군시절에 자신의 처가(외척)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또한 세종이 왕위를 받았지만 대리청정 기간에 아들의 처가집인 소헌왕후의 친정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도 거의 멸문에 이를 정도로 제거하였다.

절대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있는 세력들을 미리 제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헌왕후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도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아버지의 권위 앞에 아무 말 못하였고, 시류에 따라 역적(심온을 지칭)의 딸인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사(無事)한 것만으로 위안삼아야 했다.

태종은 심온
(沈溫)을 사사(賜死) 후 이후 주변에서는 심온(沈溫)의 여식인 소헌왕후 폐출(廢黜) 주장을 일축하였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은 상왕(上王)이 되었고,  비(妃)인 원경왕후는 대비(大妃)가 된다.

궁안에 모든 궁녀(宮女)는모두 왕(王)의 여인이다. 태종과 양녕대군(폐세자)을 모셨던 궁녀들은 모두 방출되어야 했다. 이는 궁녀들의 운명이었다.  기존의 궁녀들이 방출되면, 새로운 궁녀를 충원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궁녀 김씨(宮女 金氏)도 어린 나이에 입궁(入宮)하었다. 귀여운 어린 아이지만  그녀에게는 귀태가 철철넘쳤고, 어진 품행과 더불어 곧 궁안에서 소문이 돌고돌아 원경왕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원경왕후는 궁녀김씨를 불러 그녀의 인물됨이 궁에서 떠도는 소문이 과장이 아닌 것을 알았고, 그녀를 이리저리 둘러 보았지만, 그녀에게서 티끌 하나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몸가짐과 모든이에게 덕을 보임으로써 원경왕후에게 이쁨을 받았다. 

 

원경왕후는 동변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참담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는 며느리인 소헌왕후에게 궁녀 김씨를 보내 지밀나인(至密內人: 궁궐의 대전(大殿)이나 내전(內殿) 등 임금이나 왕후, 왕세자가 항상 거처하는 곳에서 이를 모시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소헌왕후의 심상한 마음을 궁녀김씨가 좀 달래주었으면.." 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으로 보냈다.  이때가 1418년 세종이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한 해이다.

소헌왕후의 지밀나인(至密內人)으로 있다가 세종의 눈에 띄어 궁에 들어 온지 8년만에 결국 그녀의 나이 21세 때에 세종(世宗)의 성은을 입어 1427년 세종 9년에 첫 아들인 계양군(한확의 사위, 막내처제는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을 낳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12년동안 모두 6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을 낳았지만 안타갑게도 딸 두명이 모두 요절하여 이름도 없다.

12년 동안 꾸준히 왕을 모시면서, 줄곧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면서도 정비인 소헌왕후와의 갈등도 전혀 없었다. 소헌왕후는 오히려 궁녀 김씨를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세종의 성은(聖恩)을 입은 뒤 소의(昭儀)를 거쳐 1439년 세종 21년에 귀인(貴人)이 되었다. 당시 세종이 도승지 김돈에게  "김씨의 출신이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고 묻자 김돈이 신개 등과 의논해 귀인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그녀는 정1품인 신빈(愼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막내아들인 영의 유모(乳母)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

세종에게는 소헌왕후가 신빈김씨와도 사이가 좋아, 세종은 애틋하게 소현왕후를 대하였고, 두 분 사이에서 매년 아이를 생산하게 된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을 낳은지  2년후에  안평대군이 태어난다. 안평대군에게 사랑이 기울자 칭얼대는 수양대군의 양육은 신빈김씨에게 주어졌다.

업고, 씻기고, 재우고 , 먹이고.. 이렇게 자신을 키운 사정을 알게 된 수양대군은 어머니로서 신빈김씨를 예우하였고, 신빈김씨의 2남 의창군이 훗날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어도 불문에 붙이고 , 3남 밀성군이 자신의 거사(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크게 중용한 것은 바로 신빈김씨에 대한 배려이고 보답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1434년 세종 16년에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막내아들인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의 유모(乳母)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

신빈 김씨(愼嬪 金氏: 1406~1464)는 김원(金元)의 딸로, 원래는 내자사(內資寺)라는 절의 노비이었다. 절에 있다보니 당연히 그녀는 그녀는 평소에 불교를 믿었었는데, 세종(世宗)이 죽은 다음에는 여승이 되었다.

1450년 문종(文宗)이 즉위하면서 사망한 막내아들 담양군을 위한 불사(佛事)비용으로 조정에서 쌀 500석을 하사받았으며, 1452년 단종(端宗)이 즉위하면서 그녀의 아들 의창군의 청원에 의하여 그녀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령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조(世祖) 10년, 1464년에 5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그때 세조(世祖)는 쌀, 콩 등 모두 70석(石)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  

절의 노비(奴卑)에서 세종대왕의 후궁에 까지 오른 그녀의 일생이 드라마틱하고, 조선 초기에 최고의 신데렐라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신분 상승을 떠나, 그녀의 세종(世宗)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름답고 깨끗한 삶은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을 떠나서라도 그 자체가 아름답다. 300여년이 지나 정조(正祖)가 화성의 융건능(隆健陵: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묘)으로 참배를 갈 때에 그녀의 삶을 칭송하며 그녀의 묘(墓)에 치제(致祭: 왕이 재물과 祭文을 내려 죽은 신하를 제사지내는 것)를 드리게 하였을 정도로 말이다.

정조(正祖)가 내린 그녀를 위한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 온화하게 아름다운 덕으로 인후한 공자를 많이 낳았다. 왕후를 공경하고, 여러 후궁과도 잘 지내 왕가의 번성에 큰 일을 하였다. 매사를 은헤롭게 하고, 겸손함으로 왕실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임금이 탄 수레가 처음 멈추니 무덤 앞에 선 돌짐승이었다. 바라건데 이 잔을 흠향하시고, 세대가 아득하다고 하지 마소서........."

그녀는 유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더 유학자다웠다. 온화함 심성과 부드러움 마음 그리고 아름다운 생각만으로 조선 초기에 신분을 뛰어 넘는 신데렐라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왕들은 많은 왕자(王子)를 생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왕자가 많아야 신생국 조선의 기틀과 왕권을 확실히 다질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슴은 분명하다.

세종대왕만 하더라고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비롯해 벼슬을 내린 부인만 열명이었고, 자녀는 모두  22명, 즉 아들 18명과 딸 4명이었다.

상왕(上王)인 태종 이방원은 소헌왕후와 잘 살고 있는 세종에게  4명의 후궁을 추천한다. 그리고  태상왕(太上王)이자 세종의 큰아버지인 정종(定宗)은 세종이 즉위하고 6년이 지난 후 정승인 변계량을 불러

"소헌왕후가 이미 세자를 낳았으나, 임금의 자손은 넓히지 아니 할 수 없으니, 대신들이 의논하여 ,후궁이 될만한 여인들을 선택하여 보고하라..."고 명을 내린다.
세종도 이러한 뜻을 잘 알았다. 그는 세자(世子)도 후궁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만든 것이다.

흔들리는 조선 초기에 권좌 쟁탈을 위해 형제간에 죽이기도  많이 했고, 억지로 덤탱이를 쐬어 외가(처가)집을 숙대밭으로 만들어도 봤고, 하지만 아무 힘 없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다음 왕인데 너무 깊은 죄책감과 괴로움에 빠지지 말고, 여색을 즐김으로 참담한 이 상황을 벗어나겠끔 조그만한 아버지의 배려가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