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죄의 역사
우리나라 간통죄의 역사는 고조선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지》의 동이전에 ‘남녀가 음란하면 모두 죽였으며, 투기하는 여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 나라의 남쪽 산위에 버려 두어 썩게 했다. 여자 집에서 시신을 가져 가려면 우마(牛馬)를 바쳐야 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는 시기라 여성의 외도에 더욱 엄격했다.
백제는 간통한 여성을 노비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는 아내가 간통한 경우 남편은 상대 남자를 죽이고 처를 내쫓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명률(大明律)의 규정에 따라 미혼과 기혼을 불문하고 남녀를 동일하게 처벌했으나, 유부녀의 간통 행위에 대해서는 가중처벌을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간통에 매우 엄했던 나라는 로마다. 로마는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면 재산을 몽땅 빼앗고 추방시켰다.
카스트라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인도도 유별났다. 같은 계급의 남녀가 간통했을 경우에는 가벼운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계급이 낮은 남자가 높은 여자와 간통하는 상음(上淫)의 경우에는 남자의 심벌을태워 잘랐고, 그것도 모자라 빨갛게 달군 철판에 눕혀 화형에 처했다. 또한 그 반대로 높은 계급의 남자가 낮은 계급의 여자와 간통했을 경우에는 쇠로 만든 남자 심벌을 불에 달구어 여성의 질 속에 삽입해 음부를 태웠다. 철저하게 계급적 신분에 따라 형벌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많은 특혜를 누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노비에 대한 간통이었다.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여성 노비는 기혼과 미혼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범할 수 있었는데, 이를 ‘갓김치 먹기’라고도 했다. 노동에 찌든 여종의 몸에서 땀 냄새가 났기에 갓김치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처벌도 솜방망이 정도에 그쳤다. 어우동(於于同)에 버금가는 섹스 스캔들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유감동(柳甘同)은 평양현감을 지낸 최중기의 아내로 무려 39명과 간통 행각을 벌였다. 그녀가 사통한 인물 중에는 사헌부 지평, 고을의 수령, 공조판서를 비롯한 공신의 자제 등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대부의 부녀자였기 때문에 법에 따르면, 그녀와 관계를 맺은 남성들은 모두 사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장형 또는 파직의 형벌을 받는 데 그쳤다. 유감동이 음녀(淫女)이기 때문에 간통한 남자 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판결 덕분이었다.
차별적인 남성 중심의 성문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개화(開化) 바람이었다. 1889년 3월, 몰락해 가는 조선왕조의 덕수궁 앞에서 50여 명의 여인네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인들은 장대에 ‘한 지아비가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덕의를 잃는 행위(一夫二失 悖倫之道 德義之失)’란 글을 매달고 축첩 반대 구호를 외쳤다. 고종 황제에게도 후궁을 물리쳐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했는데, 마침내 1905년 간통죄 공표를 이끌어 냈다.